이야기보따리 503

[자료]안양역의 변천과정과 숨은 이야기

안양역의 변천과정과 숨은 이야기 나의 고향은 급행열차가 서지 않는 곳 친구야, 놀러 오려거든 삼등객차를 타고오렴 - 김대규 시인의 엽서 - 경부선 개설과 함께 1905년 1월 1일 문을 연 안양역은 2001년 12월 14일 최신시설의 민자역사로 탄생됐으며 전동차를 포함 새마을호, 무궁화호, 화물열차 등이 경유하고 있으며 하루 출퇴근시간대만 최대 4만여명이 이용하는 것으로 안양역 측은 집계하고 있다. 그렇다면 안양역은 어떤 변천 과정을 거쳤을까. 100년 전 안양역의 모습을 상상해 보셨습니까? 독일인 헤르만 구스타프 테오도르 산더(1868∼1945)가 1906년부터 1년여간 러일전쟁의 흔적을 조사하는 여행길에 기차가 정차한 1906년 9월의 '안양역 풍경'은 시간과 공간을 넘어 지난 과거를 되돌아 보게 한..

[기록]효성 안양공장 잔디운동장 불에 탄 사건

효성 안양공장 잔디운동장이 불에 탄 사건 방수조작을 하지 못해 공장을 다 태울 뻔한 사고 (2013-04-29 경기북부신문 기사) 1983년 11월에 소방펌프차 방수조작을 할 줄 아는 진압요원(경방)이 없어서 운동장의 잔디를 다 태우고 공장까지 화재가 확산될 뻔한 사례입니다. 경기도 안양에 현재는 효성그룹의 섬유공장인 동양나이론이란 회사가 가진, 당시에는 찾아보기 힘든 잔디로 되어 있는 축구장에서 열린 회사직원들의 소방기술경연대회를 지원하기 위하여 10여명의 소방공무원이 소방펌프차 1대를 동원하여 대회 준비 중이었습니다. 그 때 갑자기 담뱃불에 의한 화재로 추정되는 불이 나서 순식간에 인근의 야적된 섬유류와 공장 주변까지 화재가 확대될 위험한 상태가 될 때까지 소방차를 세워놓고도 구경만 하였습니다. 담당..

[자료]6.25전쟁에서 수리산을 지킨 형제의 나라 '터키'

‘형제의 나라’ 터키, 6.25전쟁에서 수리산을 지켰다 지역신문발전위원회 지원 기획취재 - ⑥ [군포신문 2010-08-26일자] 1951년 수리산 탈환에 큰 공 … “군포는 터키에 보은의 표시해야” 기념비 건립, 참전용사 초청행사 등 도립공원 연계 추진시 시너지 효과 올해(2010년)는 6.25전쟁이 발발한지 60주년이 되는 해다. 당시의 젊은이들은 세월이 흘러 하나둘 세상을 떠나가고 현재의 젊은이들은 6.25의 참상에 대해 모르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 지역 군포에서 당시 어떤 전투가 있었고 어떤 사람들이 이 땅을 지켜내기 위해 희생됐는지를 아는 사람도 많지 않을 것이다. 이번호에서는 1951년 1월, 수리산 고지를 탈환하고 이 지역을 지켜내기 위한 사람들에 대해 조명해 보고, 수리산도립..

[기억-정진원]1950년대 안양시장(구시장) 이야기

[정진원]그곳에 ‘안양시장’이 있었다 50년 전 안양시장(市場)은 그야말로 궁벽한 산골 촌놈을 어리둥절케 한 별유천지였었다. 당시 수푸르지(지금 비산동)에서 안양천 다리(지금 임곡교)를 건너서 철길을 넘어 경수국도까지의 오른편 넓은 터에 안양시장이 자리 잡고 있었다. 아마도 당시 안양의 유일한 시장이었을 것이다. 현재는 상전벽해 시장의 흔적조차 찾을 길이 없다. 엄마 치맛자락을 붙잡거나 머슴의 지게꼬리를 잡고 힘겹게 걷고 걸어서 그곳엘 갔었다. 구리고개 언덕에 올라서서 한숨을 내쉬면 멀리 신세계 안양의 바람이 불어오는 듯했었다. 구리고개 밑에 운곡 마을을 오른쪽에 두고 산모롱이를 돌면 제법 곧게 된 한길이 뻗어있었는데, 거기를 걸으면서 안양쪽을 보면 기차가 하얀 연기를 뿜으면서 지나가는 모습이 보이고, ..

[기억-정진원]1950년대 안양 인덕원사거리

[정진원]50년 전 안양 인덕원사거리 인덕원 사거리에서 청계 방면으로 진터를 지나 이미 마을을 옆에 두고 작은 고개를 넘으면 덕장골이었다. 50여 년 전 내 고향 마을은 마을이랄 것도 없을 정도로 서너 채 집으로 된 작은 동네여서, 마을 끝 언덕 위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하얀 겨울 입김이 보였고, 이웃집들의 애기 우는 소리, 기침하는 소리, 대문 여닫는 소리 등이 모두 들려서, 시쳇말로 프라이버시가 있을 것도 없고, 있어도 지켜질 수 없는 한 집안 같은 동네였다. 느티나무 가지 밑으로 나 있었던 집 너머 오솔길에서 사당골 개울까지와 아래 논가 동네 어귀 향나무에서 뒷동산 소나무가 서 있었던 곳까지가 산토끼 굴 같은 우리들의 둥지였다. 그 당시에 인덕원 사거리는 대처였다. 우리 마을에 없는 것들, 볼 수 없..

[기억-최병렬]인기DJ를 스카웃했던 70년대 안양의 음악다방들

인기DJ를 스카웃했던 70년대 안양 음악다방 이야기 1970년대는 통기타, 장발, 나팔바지와 함께 LP음악을 들려주었던 DJ가 인기를 누리던 음악다방을 빼놓을 수 없다. 당시 다방의 추억이 유별났던 곳은 단지 차만 팔고 약속장소만이 아니라 그 시절 음악을 들을 수 있는 믄화 공간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뽀얀 담배 연기로 가득찬 다방은 유리창 속에 앉아 스피커를 통해 전해지는 'DJ'목소리와 함께 흘러나오는 카펜터스와 아바, 스모키 등의 팝송과 때로는 신나는 디스코 장단에 흥겨워하는 모습은 지난 70년대를 거쳐 80년대 중반까지 자리했던 '음악다방'속의 한 풍경이다. 음악다방의 얼굴마담은 단연 DJ였다. 유리창 너머 뮤직박스속의 DJ들은 왜 그리도 멋지고 경외스러웠던지. 그 시절 젊은이들은 누구나 한번쯤은 ..

[기억-최병렬]안양 과거 문화사랑방 '곧망할' & '대합실'

안양엔 끼 있는 문화예술인 사랑방 '곧망할' 있었다 “우린 망한다는 확신 아래 여기 작은 꿈을 이름하여 장소를 만들었습니다. 실패는 두려운 것이 아니라 다만 혼란스러운 것이라는 이론으로 출입구를 냅니다.” -곧 망할 카페 전단지- 1978년 5월 안양시 만안구 안양4동 부림상호신용금고 앞 중앙시장 골목길 안쪽 건물 지하에 당시로는 아주 정치적이고 요상한 상호를 내건 카페가 문을 열었습니다. 이름하여 ‘Gote manghale’(곧 망할) 입니다. 이 카페의 주인장은 알마전까지 안양에서 하늘새 조각가로 잘 알려진 이강식 선생(2012년 병점으로 이사를 하셨지요)과 당시 안양에서 연극인으로 활동하던 윤고성씨(미스 강원과 결혼한 후 안양을 떠나 춘천으로 갔는데 전 아직 그 이후 만나지를 못했음... 춘천의 밤..

[자료]안양풀 - 안양유원지 - 안양예술공원

안양풀 - 안양유원지 - 안양예술공원 경기 안양시 안양예술공원. 과거 안양 풀 또는 안양유원지로 불리우던 이곳은 성산과 관악산의 풍부한 문화유산과 더불어 고래로 시인묵객들의 발길을 붙잡아 풍류담과 더불어 많은 시문을 남기게 하기도 했으며 고려조의 명신 강감찬은 이 곳을 경기금강이라고 불리웠다. 특히 조선왕조실록 태종 17년 편에 의하면 태종 17년 금천 현감 김 문과 수원 부사 박 강생이 과천 현감 윤 돈의 전별잔치를 안양유원지 계곡에서 열었는데 강권하던 소주를 못 이겨 김 문이 갑자기 죽는 사고가 발생하였다. 어전까지 보고된 이 사고에 대한 태종의 수습책은 의외로 간단해서 "술을 권하는 일은 고래의 미풍이지 악습이 아니다. 그러나 사람이 죽은 일은 큰일이니 관련자들을 파직하라"는 명쾌한 판결로 매듭을 ..

[자료]중초사-안양사-유유공장-김중업건축물, 천년의 역사

중초사-안양사-김중업건축물-천년문화관 경기 안양시 만안구 석수동 212-1번지 옛 유유 부지는 신라 제42대 흥덕왕(興德王) 2년인 827년 세워진 중초사(中初寺) 절터로 알려져 왔으나 고려 태조 왕건(877~943)이 900년에 지은 안양사 터가 1100년만에 발굴돼 경기서남부에서 보기드문 대규모 사찰로 밝혀졌다. 재단법인 한울문화재연구원이 유유 안양공장 부지에 대한 1.2차 발굴조사를 통해 안양사 명문기와 발굴에 어어 문헌속 안양사 7층 전탑 터를 찾아내는 등 고대가람 안양사 흔적이 드러나 문화재청이 2010년 현장에서 지도위원회에서 열고 실체를 확인함으로 안양이란 지명이 고려시대 안양사에서 유래했다는 역사적 정체성까지 찾게됐다. 안양(安養)이란 불가에서 아미타불부처님이 상주하는 청정(淸淨)하여 맑고..

[기억-조성원]안양초등학교 운동장의 오래된 기억

[조성원]안양초등학교 운동장 나는 안양 초등학교 38회 출신이다. 입학하던 해가 1964년이니 우리학교는 일제 때 생긴 안양에선 제일 오래 된 학교다. 그 시절의 안양은 시흥군에 속하는 읍 소재지였으며 인구가 2만 명이 채 안되었다. 그러기에 그 시절의 안양사람을 만나면 모두가 동문인 셈도 된다. 지금의 안양은 과거의 논밭이나 하다못해 냇가마저도 시멘트가 덮이면서 모양을 달리 하였고 평촌과 산본이라 하는 신도시까지 생겨나 인구 50만이 넘는 큰 도시가 된 것이지만 당시 안양은 공설 운동장 하나 없는 여느 가난한 시골의 소읍과도 같았다. 4학년 때 배운 지리책에 안양은 아주 짤막하게 6 25때 격전지로 포도밭이 많은 어령칙한 동네로 표기되어 있으며 실제 우리 집 주변은 모두가 포도밭이었고 천일포도주 공장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