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보따리/기억 118

[임희택]안양 더푼물 고개와 범고개 그리고 문산옥(2022.07.12)

더푼물 고개를 엔진을 끈 채 달려 내려와 범고개 주막거리에 뽀얗게 먼지를 일으키며 지무시가 지나가자 문산댁은 하얀 신작로에 물 한대야를 힘차게 끼얹었다. 촤르륵... 한길 건너 문산옥 맞은 편에 까마득히 솟은 미류나무 중턱 어딘가에서 매미가 맴맴 울어댔다. 아직 해가 중천에 뜨기도 전부터 술꾼들 둘이 문산옥 가게 바닥에 파묻힌 항아리 뚜껑을 침을 꼴깍 삼키며 넘겨다 보았다. 문산댁이 항아리 뚜껑을 열자 시큼한 막걸리 향기가 물씬 풍겨 나왔다. 술꿀들은 누구라 할 것도 없이 침을 한 번 삼키며 "형수, 거 시원하게 한대접씩 주세요." 한다. 이제 겨우 아침상을 물리고 설겆이를 마친 문산댁은 이른 시간에 술을 청하는 술꾼들은 타박하지도 않고 사람 좋아보이는 눈웃음으로 누런 양은 대접에 가득 담아 한잔씩 건넸..

[임희택]안양 박달동 근명중학교와 대성초자 공장(2023.06.17)

내가 아주 어릴 때 근명중학교는 박달동 벌 산밑에 있었단다. 학교에 다니는 학생은 어릴 때라 본 기억이 없지만 건물 가운데 떡하니 시계 붙었던 자국만 남아 있었다. 그 학교 운동장 길 쪽으로 대성초자라는 마호병 공장이 있었는데 외사촌 형이 거길 다녔었다. 마호병 만들고 남는 유리물로 애들 놀이하는 다마 ㅡ 구슬도 만들었는데 하루는 구슬을 준다기에 공장 구경 삼아 갔었다. 아저씨들은 난닝구바람으로 기다란 파이프에 유리녹은 물을 묻혀 이리 저리 몸을 비틀며 불어서 마호병을 만들고 있는데 날도 덥고 유리 녹이는 용광로도 덥고 얼굴이 벌겋게 달아지도록 온 힘을 다해 파이프를 부는 아저씨들도 덥고... 더운 열기 속에 애들 미끄럼틀을 작게 만든 것 같은 틀에 유리물을 조금씩 떨어뜨리면 그게 때구르르 굴러서 밑에 ..

[임희택]말이 있던집 도살장자리 경덕이형네 추억(2023.07.09)

말집 안동네 살다가 주막거리로 이사를 나온 뒤인지 아니면 그전부터 있었는지 기억에 없을 정도로 관심이 없던 그 집이 관심거리 안으로 들어온 것은 그집 아들 경덕이 형때문이었다. 우리집 앞 한길에는 아버지와 청년들이 학림산에서 옮겨다 세워놓은 비석같은 바위가 세워져 있었는데 그날도 그 바위에 기어 올라갔다 뛰어내리기를 무한반복하고 있었다. 비록 내 키가 작기는 했지만 까치발을 들고 두손을 치켜들어도 꼭대기에 닿지 않을 정도의 높이를 가진 비석바위였는데 시외버스가 지날때마다 먼지가 폴폴 날리는 속에서도 내 또래 아이들의 기막힌 놀이터 역할을 하였다. 하여간 동인천 가는 버스인지 물왕리 가는 버스인지 먼지 날리며 더푼물 고개쪽으로 올라가고 먼지 뒤에서 마치 서부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말탄 이가 짠하고 나타나 ..

[임희택]시멘트담장 판넬만들기, 거푸집과 폐유(2021.09.10)

어릴 때 집에서 시멘트 제품을 만들어 납품을 했는데 내 아버지는 팔기는 잘 파는데 수금을 잘 못하셨다. 게다가 새벽부터 한두잔 하신 것이 점심 무렵이면 인사불성 되기 일쑤. 덕분에 가끔은 내가 담장을 만들곤 하였다. 먼저 자리를 잡고 그 위에 쇠로 만든 거푸집을 조립한다. 모래를 체로 걸러 시멘트를 섞은 뒤에 물을 넣고 몰탈을 만든다. 한 뼘 가량 거푸집에 몰탈을 넣고 쇠 막대기로 잘 다진 후에 철사를 몇가닥씩 넣는다. 철사가 고르게 잘 들어가야 잘 깨지지 않는다. 그리고 다시 몰탈 넣고 다지고 철사 넣고 또 몰탈 넣고 또 다지고 평평하게 하면 일단 끝. 하루가 지나면 굳는데 거푸집을 제거하고 물을 뿌려 이삼일 더 양생한다. 완전히 굳으면 한 쪽에 쌓아 놓고 판다. 만드는 과정은 이랬다. 거푸집이 잘 빠..

[임희택]육골 계곡으로 학교에서 집 오던 날의 추억(2022.05.10)

종실이네 과수원에서 몰래 따온 덜 익은 복숭아를 먹으며 친목동에 사는 친구들이 아침부터 자랑을 하곤 하였다. 우리 집은 지금 범고개(호현마을이라고 바꿨는데 나는 별로 탐탁치가 않아 그냥 범고개라고 부른다) 안동네에 있었는데 길 너머로 큰 고모네가 있었고 집 뒤로는 같은 반 친구네 공장이 있었다. 사실 친목동 친구들도 집 앞으로 지나갈 때도 있지만 대개 그들은 윗동네로 우회하여 육골로 학교를 다녔다. 하지만 나는 어머니가 절대로 육골 쪽으로 다니지 못하게 하였고 범고개 사는 친구들 따라서 신작로를 걸어 학교에 다니도록 하였다. 그래서 언젠가는 나도 한 번 꼭 육골을 가보고 싶었는데 당최 그 쪽으로 가지지를 않았다. 몇달 차이 아니라고 해도 한해 일찍 들어간 학교에서 나는 유난히 작았다. 어머니는 그런 이유..

[임희택]안양 박달동 범고개와 주막거리(2023.07.07)

주막거리 어릴 때 살던 범고개는 한길 가의 주막거리, 안쪽으로 안동네 그리고 논 넘어 웃동네로 이루어져 있었다. 논이 있던 자리는 지금 안산가는 고속도로의 고가차도가 자리를 잡고 있다. 지금 주유소 자리, 그러니까 주막거리에 우리집이 있었고 맞은 쪽에 문산옥이 있었는데 가게 바닥에 항아리가 뚜껑만 내만 채 묻혀있었다. 문산옥의 문산댁을 큰엄마라고 부르며 왕래를 했는데 가끔 미루꾸도 주시고 삶은 곤달걀도 주시곤 했다. 문산댁은 어디 멀리에다 아들을 두고 와서 늘 끌탕을 하더니 내가 중학교 들어갈 무렵 그 아들이 왔다. 그는 가슴이 유난히 불쑥 나온 새가슴이었는데 어려서부터 나뭇지게를 힘들게 진 탓이라고 한숨 섞어 얘기하시곤 했다. 문산옥 앞에서 버스를 내려 길을 건너다 트럭에 치여 죽은 동생때문에 범고개를..

[김승용]재밌는 우리마을 안양 소골안의 기억(2020.09.14)

김승용 출처: 페이스북(https://www.facebook.com/profile/100002665643804/search?q=%EC%95%88%EC%96%91 )에서 내가 살던 마을은 계곡 마을이라 거의 남북으로 흐르는 계곡천 좌우로 마을이 이루어졌다. 그래서 집들은 대부분 동향 아니면 서향이었다. 아니면 무향집이었다. 집 지을 자리가 너무 좁아 집이 사방의 집들 가운데 들어앉아 어른 어깨 넓이의 좁은 골목으로 지그재그 들어가야 제 집에 드나들 수 있는 집들도 꽤 됐다. 그 마을은 조금이라도 비가 많이 오면 어른들이 죄다 하천가에 나와 물이 불어나는 속도를 지켜봤다. 하천이 넘치면 하천가 집담은 여지없이 무너졌으니까. 대신 물 걱정은 안 했다. 수도가 들어온 게 70년대 중반으로 안양시에서 아마 가장 ..

[김승용]어린시절 안양 냉천동에서의 기억(2022.02.22)

김승용 페이스북(https://www.facebook.com/shinjiazc)에서 발췌 가뭄 걱정은 절대 않지만 봄가을에도 홍수 걱정을 해야 하는, 아주 좁고 깊은 계곡 마을 출신이다. 38따라지 중에서도 무척이나 가난한 축들이 안양에서조차 살 집을 못 구해서 흘러들어 이루어진 마을이다. 사람 살기 어려운 곳인데도 꾸역꾸역 산자락을 파내고 물가에 축대를 쌓아가며 집을 짓고 살았다. 그마저도 힘들면 여럿이 돈을 추렴해서 물이 휘돌아 나가는 쪽, 그래서 범람하기 쉬운 곳에 나무기둥을 수십 개 박고 반은 물에 반은 바위에 걸친 반 수상가옥을 다닥다닥 연립으로 지어서 방 하나 부엌 하나에 공동변소와 공동'손펌프' 하나로 살았다. 가난이 싸움 붙인다고, 한시도 조용할 날이 없는 동네였다. 매일 피 터지는 폭력은..

[최승원]6.25전쟁시대 안양(2022.10.18)

6.25 전쟁시대 안양 6월25일 새벽4시 전면남침으로 6.25전쟁이 터지자 안양 비산동이 술렁거렸다. 한강교가 28일 사전 폭파되어 7월3일 북한군전차 한강도하로 남침이 다소 지연되었으나 7월4일 한강방어선이 붕괴되었다. 안양지역은 산세로 방어에 유리한 지역으로 남침시 국군의 안양지역방어는 견고했다고 인민군은 기술하고 있다. 탱크에 밀려 안양을 포기했지만 무기가 같은 수준 이라면 한국전쟁을 안양에서 막아냈을 것이다. 안양함락직전 안양역 남측 건널목에 는 하얀 옷을 입은 사람들이 남부여대하고 하얗게 깔려있었다. 모친이 철길에들어서자 넘어져 무릅에서 피가 철철 나와 우리는 비산동 집(심재황 초교 동기집) 부엌채로 귀가 하였다. 동네에 심부자 집 큰기와 집이 인민군내무서로 징발되어 초병이 칼이긴 총을 메고 ..

[최승원]6.25전쟁 나의 이야기()

6.25전쟁 나의이야기 - 보리가 익어 추수시 비산동 태평방직사택에서 돼지도 키우고 살던중 6.26전쟁이 터졌다. 인민군은 식량이 현지 조달이라 추수기를 남침의 시기로 보았다. 모든 피난민은 남부여대(男負女戴)하고 새하얀 무명 흰옷을 입고 경부선철도를 들어서자 마자 인파가 몰리는 중 넘어져 모친의 무릎에서 피가 심하게 나와 피난을 포기하고 집으로 철수하였다. 국군들은 안양천 안양방어선에서 치열한 방어를 다하였으나 무너지고 적치가 되었다. 동네 심 씨네 큰 한옥은 내무서가 되어 긴 충을 멘 인민군이 지키면서 동네사람들을 통치하였다. 동네 큰집은 아군이 사용하는 경우도 있기에 수난이다. 식품을 현지 조달하는 인민군은 우리집에서 키우던 새끼 밴 돼지를 공출하였었다, 이내 뱃속에 있던 새끼는 바켓스에 넣어 집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