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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군포라는 이름은 어디에서 비롯되었나?

군포라는 이름은 어디에서 비롯되었나? 사람들에게는 모두 각자의 이름이 있듯이 땅에는 땅 이름, 즉 지명(地明)이 있다. 지명은 인류의 사회생활과 더불어 자연발생적으로 나타났으며 그 지역의 주변 환경과 역사, 이에 대한 의미부여 등 여러 가지 요인이 다양하게 얽히면서 생겨나게 되었다. 따라서 지명에는 그 지역에 대한 역사와 풍속, 문화 등은 물론 그 지역의 독특한 자연환경이나 생활풍습 등이 녹아있는 경우가 많다. 지명에 대한 유래를 살펴보는데 있어서 먼저 해야 하는 것이 있다면 그 지명에 대한 의미를 해석하는 일이다. 지명이 고유어(순 우리말)라면 이에 대한 의미를 찾아보는 것이고, 한자어가 있다면 그 한자어에 담긴 의미를 해석해 보는 일이다. 군포시는 1979년 5월에 시흥군 남면에서 군포읍으로 승격하였..

[최병렬]군포장의 변천과정 이야기

사람들의 왕래에 영향을 미친 또 하나의 요소는 장시이다. 장시는 15세기 말에 발생하여 조선 후기에는 전국적으로 5일장의 형태로 발전했다. 일반 백성들은 장시에서 잉여 물자를 팔고, 부족한 물자를 보충하였다. 따라서 장시는 일반 백성들의 왕래에 중요한 요인이 되었으며, 옛길의 형성에도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안양시 지명유래』에 따르면, 군포장(軍浦場)은 수원에서 지지대 고개를 넘어 안양을 거쳐 한양으로 가던 시흥로 역로(驛路)의 중간 지점인 현재의 호계동 삼신아파트와 진우아파트 지역에 인접한 구군포 사거리와 안양천(맑은내, 군포천) 사이로 지금도 이곳 구장터 부근 도로는 구군포길로 불리우고, 옛 군포장이 위치하던 지역은 ‘구장터1로’에서 ‘구장터3로’까지의 도로 명칭을 지니고 있어 이곳이 장터였음을 보..

[자료]수리산과 모락산의 역사

경기 수리산과 모락산의 역사(월간산 2001년 6월호) 수리산(修理山)-태을성 초제를 지내던 독수리 형상의 산 경기도 안성의 칠현산에서 맥이 북으로 뻗어가서 용인의 보개산, 수원의 광교산을 지나 서쪽으로 다시 이어지는 한남정맥(漢南正脈)이 수리산의 山經이다. 경기도 안양시·군포시·안산시의 진산이며, 안양·군포·안산·시흥의 네 도시가 접경하는 해발 474.8m의 산이다. 비운의 임금 단종이 사냥을 했을 만큼 그 옛날엔 숲이 무성하고 산짐승이 많았던 산이다. 2년 10월 1일 기묘일조에, "임금이 보천리에 이르러 낮 수라를 들고 수리산(修理山)에서 말을 몰아 사냥하였다. 해질 무렵에 과천에 이르러 비을매리(飛乙每里: 지금의 안양 비산동 추정)에서 거가(車駕)를 멈추었다."고 이 때의 일을 기록하였다. 주변이..

[자료-오기환]문화예술과 역사4, 안양 지정문화재 및 문화유산

문화예술과 역사가 어우러진 안양- 안양광역신문사(aknews0511@daum.net) 2015-09-04 오전 10:12:00 1591 안양문화원 향토문화연구소 부소장 오 기 환 5. 삼막사는 신라의 승려, 원효·의상·운필이 창건하여 산의 이름을 삼성산이라 칭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조선후기 마애불과 칠성각이 건립되는 등 지속적으로 중창과 중건이 이루어지면서 법등이 이어져 왔으며 현대에 들어와 크게 중창이 되면서, 대웅전·명왕전·망해전·관음전·천불전 등 다수의 건물들이 들어서 있다. 초석·석탑·석간·석상·마애삼존불 칠성각 등 전통사찰의 위상을 보여주는 다수의 유적, 유물들이 전하고 있는데 그 수가 안양에 소재하고 있는 사찰중 가장 많다. 사찰은 안양사·삼막사·불성사·염불암·망월암·망해암·반월암 보장사 ..

[자료-오기환]문화예술과 역사3, 안양의 전통문화재(유물.유적)

문화예술과 역사가 어우러진 안양- 안양광역신문사(aknews0511@daum.net) 2015-08-28 오전 10:52:00 1375 안양문화원 향토문화연구소 부소장 오 기 환 3. 안양의 전통문화재(유물.유적)로 본 사회적, 경제적 변화 선사(청동기)시대의 유물인 타제석기가 평촌동 250번지 귀인마을 일대에서 수습된바 있고 동안구 관양동 산15번지 일대에서도 석핵, 찍개, 긁개, 박편석기, 망치돌, 식재류 등의 석기류가 확인되었다. 최근 광역상수도사업 확장공사시 선사시대의 생할터전을 발굴 확인하여 보존하고 있으며, 내비산동에서도 타제석기가 수습된 바 있다. 4 관양동 유적에서는 청동기시대의 주거지 8기와 수혈유구 4기가 확인되었고, 주거지는 대략 해발 600미터 내외의 구릉 남사면에 위치하여, 장축 ..

[오기환]문화예술과 역사2, 조선사회와 안양의 발전

문화예술과 역사가 어우러진 안양- 안양광역신문사(aknews0511@daum.net) 2015-08-20 오후 6:51:00 1257 안양문화원 향토문화연구소 부소장 오 기 환 2. 조선사회와 안양의 발전 조선 후기에 안양은 한적하기 그지없는 시골마을이었다. 하지만 정조가 즉위하고 수원에 현룽원이 조성되고, 새로이 화성이 축조되면서 안양은 새롭게 부상했다. 이는 임금이 행차할 때 기존 과천길을 버리고 시흥 안양을 경유하는 길을 조성하면서부터였다. 원래 화산능행 노정은 노량의 배다리를 건너 요양봉저정-만안고개-금불암-금불고개((현 숭실대 부근)-사당리-남태령-과천행궁-찬우물점-인덕원천교-갈산점-원동점-사근참행궁-지지대고개를 거쳐 화성에 이르렀다. 이는 호현(여우고개) 또는 염시현이라 불리던 남태령을 넘어 ..

[최태술]알기쉬운 안양의 역사

구석기시대 안양 평촌 택지개발을 위해 지표조사를 할 때 타재석기 일부가 발견되기는 했으나 안양 인근 지역에서 더 이상의 구석기 관련 유적이 발견 되지 않아 아직 확실한 학설을 내놓을 수 없는 상황이다. 신석기시대 안양 안양에서 직접 신석기유적이 발견된 것은 없어나, 이미 확인된 시흥시의 오이도 패총이나 한강 유역의 미사리 유적지를 보아 서해안과 한강을 연결하는 범주 내에 위치한 안양권도 신석기문화권에 속하였을 것으로 추정 할 수 있다. 청동기시대의 안양 청동기시대 안양의 확실한 증거는 평촌 개발을 위해 지표조사를 할 때 분포 되어 있던 여러 기의 지석묘(고인돌)들이 확인되었다. 이 지석묘들을 지금 평촌 자유고원 내에 옮겨 보존 하고 있다. 이밖에 청동기문화의 유산인 고인돌은 인근 군포, 의왕, 시흥시 등..

[오기환]문화예술과 역사1, 안양의 연혁

문화예술과 역사가 어우러진 안양- 안양광역신문사(aknews0511@daum.net) 2015-08-20 오후 6:51:00 1257 안양문화원 향토문화연구소 부소장 오 기 환 1. 안양의 연혁 안양 지역은 역사와 문화적으로 유서 깊은 곳이다. 안양이란 명칭의 연원은 고려 태조 왕건이 승려 능정을 만나 안양사를 창건한 데서 유래한 것으로, 안양사의 안양(安養)은 마음을 편안하게 지니고 몸을 쉬게 하는 극락정토를 일컬는 말이다. 왕건과 승려 능정과 함께 세운 안양사(安養寺)는 거대 사찰로 조선중기까지 상당한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안양은 지명의 연원에서부터 행정구역의 변천까지 매우 복잡한 과정을 겪어 온 것을 볼 수 있다. 즉, 서울의 관문이자 위성도시인 안양은 한반도의 중남부에 위치해 있고 관악산. 수..

[문원식]‘안양’의 유래와 뿌리

‘안양’의 유래와 뿌리 AD 900년 경 고려 태조 왕건이 궁예의 명을 받아 조공을 바치지 않던 광주, 충주, 청주 등 남쪽 3개 주를 정벌하기 위하여 삼성산 자락을 지나가던 중 산꼭대기에서 오색무지개가 어리는 것을 보고, 이상히 여겨 사람을 보내 살피게 하였더니 늙은 중 능정(能正)을 구름 밑에서 만나게 되었는데, 더불어 대화해 보니 뜻이 맞아 ‘안양사(安養寺)’를 세웠다는 기록이 중종 25년(1530)에 편찬된‘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與地勝覽)’ 등에 전해지고 있다. 이 안양사에 관한 기록은 고려와 조선시대 중엽까지 여러 차례에 걸쳐서 중수한 기록이 남아 있고, 현재 안양이란 지명의 유래라고 일반적으로 알려지고 있다. 불국정토를 일컫는 안양이라는 말이 지명으로 처음 사용된 기록은 영조 35년(1759..

[김정대]지명 금천(衿川)과 안양(安養)

금천(衿川)은 금주(衿州), 금양(衿陽)으로 통하던 향토의 옛 지명으로 가장 오래 불리던 이름이다. 문헌에 나타난 것을 보면 지명의 첫 이름은 고구려때에 잉벌노현(孕伐奴縣)이라 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뒤 경덕왕(757)때 진율군(津栗郡)이라 개칭하여 오다가 고려 태조(왕건)시기 934년부터 금천현(금주, 금양)이라 불렀다. 조선왕조 22대 정조대왕(1795)이 만안교(萬安橋)를 축조한 뒤 이 지역을 시흥(始興)이라 부르도록 하였으나, 기록상으로는 1914년 안산 및 과천과 군(郡)을 통합하면서 시흥군(始興郡)으로 명명된 것이다. 안양(安養)이란 지명은 여지도서(영조35, 1759)에 금주현(衿州縣) 현내면(縣內面) 안양리(安養里)로도 나타난다. 3군(三郡) 통합이후 시흥군 서이면 안양리를 합쳤으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