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지역얘기/담론

[최태술]알기쉬운 안양의 역사

안양똑딱이 2017. 3. 27. 20:39

구석기시대 안양

평촌 택지개발을 위해 지표조사를 할 때 타재석기 일부가  발견되기는 했으나 안양 인근 지역에서 더 이상의 구석기 관련 유적이 발견 되지 않아 아직 확실한 학설을 내놓을 수 없는 상황이다.


신석기시대 안양

안양에서 직접 신석기유적이 발견된 것은 없어나, 이미 확인된 시흥시의 오이도 패총이나 한강 유역의 미사리 유적지를 보아 서해안과 한강을 연결하는 범주 내에 위치한 안양권도 신석기문화권에 속하였을 것으로 추정 할 수 있다.


청동기시대의 안양

청동기시대 안양의 확실한 증거는 평촌 개발을 위해 지표조사를 할 때 분포 되어 있던 여러 기의 지석묘(고인돌)들이 확인되었다. 이 지석묘들을 지금 평촌 자유고원 내에 옮겨 보존 하고 있다. 이밖에 청동기문화의 유산인 고인돌은 인근 군포, 의왕, 시흥시 등에도 넓게 분포 되어있다.


부족국가시대의 안양

분명한 기록은 없지만 우리 역사에서 한강을 기준으로 해 그 이북에 고조선 그 이남에 삼한이 존재 해 있었다. 이때 안양은 만한 54개국 중 하나에 소속 되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시대의 안양

부족국가들이 고대국가로 성장하는 시기에  백제가 성립하고 안양은 백제국 영역에 속한다. 한강유역을 거점으로 발전한 백제는 지금의 경기, 충청, 전라지방을 확보 하고 있었다. 평촌지역에서 원삼국시대 것으로 추정되는 온돌식 주거지가 발견 된 것도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백제의 행정제도는 중안은 6좌평제(六佐平制)를 지방은 수도를 5부(上.中.下.前 候.)로, 부 밑에는 5항을 두었고, 전국을 5방으로 나누었다. 동방 (得安城=지금은진), 서방(刀先城.=지금?) 남방(久知下城 =지금 장성), 북방(熊津城 =지금 공주), 중방(古沙城=지금의 고부) 이러한 지방행정제도를 보아 안양은 수도권 5부 5항 중에 속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5세기를 접어들면서 고구려의 광개토대왕의 영토확장사업과 장수왕의 남하정책에 밀린 백제는 수도를 빼앗기고 웅진으로 천도하는 위기를 맞고, 이 안양지역은 고구려의 영토로 편입되었다.

고구려는 이 정복지를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그 전부터 있던 지방제도( 5부제와 부 밑에 170여 개의 성이 있고 또 3경이 있었다.) 에 따라 안양 지역을 편입 시킨다.

이 때 처음 안양지역의 이름이 三國史記에 나타난다. 잉벌로현 또는 율목군으로 나타난다.

三國史記 券35.志4.地理2 에

栗津郡, 本高句麗 栗木郡, 景德王改名, 今果州, 領縣三,

穀壤縣, 本高句麗 仍伐奴縣,, 景德王改名, 今黔州,  孔巖縣...

신라 경덕왕(35대 742-765) 때 율진군은 본래 고구려 율목군을 율진으로 개명 지금의 금과주니 영현이 셋이다.

곡양현은 본래 고구려 잉벌노현을 검(금)주로 개명 했다. 라는 기록이 있다.

위의 내용은 그동안 고구려에게 빼앗겼든 한강유역을 나,제 가 연합하여 회복은 했으나(551) 백제는 다시 신라에게 한강유역을 빼앗기고 만다.(553년 관산성=지금의옥천)

이렇게 하여 안양지역은 신라의 영토가 되었고 경덕왕 때 고구려의 율목은 율진으로 고치면서 지금의 과주라 하고 잉벌노은 곡양현으로 지금의 검(금)주로 개편하였다.(주:삼국사기 이병도역 을유문화 하권P194)

 

고려시대 안양

이렇게 시작된 안양은 후삼국으로 접어들면 이 지역은 철원을 중심으로 일어난 궁예(弓裔)의 영역에 속하게 되고 그 부하로 있던 王建이 弓裔의 명을 받고 한강이남 정벌을 내려오는 과정에서 최초로 안양이라는 말이 등장 한다.

安養寺 창건 설화에 왕건이 남쪽정벌을 내려오는 과정에 삼성산에 이르렀을 때 능정이라는 노스님을 만나 여기에 安養寺라는 절을 세우라는 말을 듣고 안양사를 세웠고 7층 전탑 도 세웠다는 말이 新增東國輿地勝覽에 전 하고 있다. 여기서 安養 이라는 말의 어원을 살펴보면 불가에서 사용하는 극락이란 말이다.

梵語=(Sanskrit語) 로 sukhāvati 란 말이다.

이것을 또 한문으로 안양이라 번역되어 기록된 것이 천수경(千手經)중 준제진언(准提眞言)에“원아결정생안양(願我決定生安養,) 원아속견아미타(願我速見阿彌陀) 이란 단어가 실려 있다. 즉[안양에 태어나기를 원한다. 아미타를 보기를 원한다.]라는 말이다.

안양이란 말은 또 있다. 佛國寺 大雄殿에 들어가는 문은 자하문(紫霞門)이고 極樂殿 들어가는 문은 安養門 이다. 또 있다, 영주 浮石寺에 들어가는 문도 安養樓이다, 여기는 문을 누각으로 지었기 때문에 안양루이다. 이외에도 서울에 安養唵,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에도 궁궐내 安養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이렇듯 안양이란 말은 불교에서 극락, 또는 극락정토 등 극락을 말하는 또 다른 이름이다.

왕건이 고려를 건국한 후 이 지역은 고려의 영토가 되었다. 고려의 지방행정은 성종 때 기초를 마련하고, 현종 때 다시 개편한 5도 양계제가 고려 지방제도의 근간을 이룬다.

도 밑에 3경, 도호부,  부, 목 군, 현, 진, 향, 소, 부곡이 있고 말단 단위로 촌이 있었다. 이 때 안양은 신라 말 율진에서 과주(果洲)로 명칭이 바뀌어 지고 별칭으로 부림(富林) 또는 부안(富安)이라 불려 지기도 했다.   
여말 공양왕 때 는 경기를 좌, 우도로 나누어 안양은 경기에 속 했다.(양주, 금주, 과주 등이 이에 속함)

 

조선시대 안양

조선의 지방제도는 건국 초기에는 고려의 5도 양계제를 유지 하다 태종 때 전면 개편하면서 8도제를 시행 한다. 도 밑에 부,목,군,현을 두었다.

이때 안양은 경기도 과천현에 속해있었다.

조선은 1895년5월에 칙령 101호에 의해 크게 개정한다. 이때는 종래의 8도제를 소지역주의를 채택하여 전국을 23부로 나눈다. 

이때의 안양은 인천부에 속하고 인천부내에 시흥,관천,수원등 12개의 현이었다. 그러나 이 제도는 시행 1년만인 1896년 8월에 13도제로 다시 고쳐 과천군 등은 경기도에 예속 시킨다.

1910년 주권상실 후 일본이 식민 통치에 유리하도록 개편한 것이 1914년 3월 부령 111호에 따라 부, 군을 통폐합하면서 과천군 과 안산군을 합하여 시흥군에 흡수시켰다.

이때 과천군 하서면 과 상서면 을 합해 지명을 서이면 으로 하면서 그 중심지를 지금의 호계 2동(구 교육청부근)에 면사무소를 두었다.

1905년경부선이 개통되기 전까지는 현재의 안양은 군, 현의 변방에 위치하고 역사의 중심에 들지 못하다. 경부선이 개통 되면서 교통의 중심이 되고 한 시대 역사의 중심에 위치하게

된다.1917년에 안양행정의 중심지가  안양리로(현 구서이면건물자리) 이전하고 이때 1936년 면의 명칭도 안양면으로 개정한다. 1949년 안양읍으로 승격,  1973년 7월1일 안양시로 승격 하였다.

현 앙양의 영역은 조선시대 삼성천과 만안교 원위치를 기점으로 안양천을 기준으로 그 북쪽을 금천현의 안양리 그 남쪽은 과천현 안양으로 구분되었으나 여러 차례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현재의 안양을 이루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