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지역얘기/담론

[오기환]문화예술과 역사1, 안양의 연혁

안양똑딱이 2017. 3. 27. 20:36

문화예술과 역사가 어우러진 안양-<2> 

 

안양광역신문사(aknews0511@daum.net)
2015-08-20 오후 6:51:00   1257 

안양문화원 향토문화연구소 부소장 오 기 환


1. 안양의 연혁


안양 지역은 역사와 문화적으로 유서 깊은 곳이다. 안양이란 명칭의 연원은 고려 태조 왕건이 승려 능정을 만나 안양사를 창건한 데서 유래한 것으로, 안양사의 안양(安養)은 마음을 편안하게 지니고 몸을 쉬게 하는 극락정토를 일컬는 말이다. 왕건과 승려 능정과 함께 세운 안양사(安養寺)는 거대 사찰로 조선중기까지 상당한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안양은 지명의 연원에서부터 행정구역의 변천까지 매우 복잡한 과정을 겪어 온 것을 볼 수 있다.

즉, 서울의 관문이자 위성도시인 안양은 한반도의 중남부에 위치해 있고 관악산. 수리산. 쳥계산. 모락산 등 동서남북이 산으로 둘러 쌓인 타원형 분지이며, 지리적으로 서울과 시흥.군포.과천.의왕과 접하여 동일한 생할권을 형성하고 있을 뿐 아니라 산업과 공업을 중심으로 한 상공업 도시였다. 안양천을 중심으로 청계천. 왕곡천. 학의천. 산본천. 수암천. 석수천. 목감천 등의 자연친화적 환경과, 불교문화를 후광으로 하는 문화예술 전통성이 어우러져 있으며, 1789년 정조13년 “호구총수”에 따르면 현재 안양지역은 경기도 과천현과 금천현에 속해 있는, 조선후기만 하더라도 안양은 한적하기 그지없는 시골마을이었을 뿐이다. 정조가 즉위하고 수원에 현룽원이 조성되고, 새로이 화성이 축조되면서 안양은 새롭게 부상될 수 있었던 것으로 본다.

1905년 서울과 부산을 연결하는 경부선 철도가 개통되고 현재 1번국도 간선도로가 뚫리면서 자연촌락에 불과했던 안양지역이 철도역을 중심으로 한 교통도시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1910년 조선을 강점한 일제는 “조선총독부 지방관제”를 공포하고 총독부령 제8호“면에 관한 규정”을 제정하여 말단 지방행정기구로서 면의 지위를 확정하고 1913년 3월 1일부터 전국적인 행정구역 개편을 단행했다.

1914년 대대적인 군현 통폐합 조치는 안양지역도 예외가 아니어서 안양이 속해 있던 과천군이 안산군과 함께 시흥군으로 통폐합 되었다. 이에 따라 시흥군의 행정구역은 과천군의 7면 55개 동리, 안산군의 6면 63개 동리, 시흥군의 6면 22개 동리를 통합하여 9면 83리로 축소, 조선후기 한말을 거치는 동안 성장 발달해 온 촌락들이 강제적인 개편을 맞게 된 것이다. 새로 편재된 면은 북면.신동면.동면.서면.과천면.서이면.남면.수암면.군자면 등 9개 면으로, 이 가운데 서이면 전부와 동면.서면의 각각 1개리가 오늘날 안양지역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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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이면은 일동리. 비산리.안양리. 호계리. 이동리 등 5개리로 편재되었다 . 서이면의 각 리를 현재 안양 지역과 비교해 보면 일동리는 동안구 관양1,2동. 부림동에 해당되고, 비산리는 비산1,2,3동 및 부흥동,달안동으로 분화되었다. 호계리도 지금의 호계1,2,3동.전부와 범게동.신촌동.갈산동이 여기에 포함된다. 이동리 또한, 평촌동.평안동.귀인동이 이에 해당한디.

안양리는 만안구 안양1동에서 9동까지 포괄하는 지역이었다. 한편 안양동 외에 만안구의 석수동과 박달동에 해당하는 지역이 한말에는 시흥군 군내면 안양리와 박달리였다. 이들 지역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당시 시흥군 동면 안양리와 서면 박달리로 각각 재편되었다. 그리고 동면 안양리는 현재 만안구 석수1,2,3동으로 박달리는 박달1,2동으로 분화되었다. 시흥군 서이면사무소가 호계리에 문을 열었으나 1917년 7월 6일 안양리로 이전하게 된다.

현재 이 자리에(안양1동674-271) 2003년 복원한 서이면 사무소가 들어서 있다.

1941년 9월 30일까지 24년간은 서이면사무소로 행정업무를 수행했다. 서이면사무소가 호계리에서 안양리로 이전되었다는 것은 안양리가 서이면의 행정 중심지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1940년 들어서면서 큰 변화를 겪게 되었다. 1941년 10월 1일 시흥군 서이면이 안양면으로 개칭되었고 영등포읍 영등포리에 소재한 시흥군 청사를 서이면 안양리로 옮기려 할 정도로 안양은 시흥군의 중심지였음을 알 수 있다.

조선직물을 비롯한 유수한 공장이 안양공장에 들어서면서 공업지역으로 발전하여 자연스럽게 인구가 증가하게 되었으며, 결국 면 행정의 중심지인 안양리를 면 명으로 바꾸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1945년 8월 15일 대통령 제159호인 “시도의 관할구역 및 시군의 명칭.위치.관할구역 변경의 건”에 의하여 시흥군 동면의 구로리.도검리.심대방리가 서울시로 편입되었으며 “읍 설치에 관한건”에 따라 시흥군 안양면이 안양읍으로 승격되어 인구 2만21명 면적 39.07㎢ 의 규모를 지니게 되었다.

1960년 들어 서울과 경기도 지역의 인구집중 현상이 가속화되고, 1963년 1월 1일에 시행된 “서울시.도.시.군.구의 관할구역 변경에 관한 볍률”에 의하여 시흥군 신동면의 잠실리.방배리.반포리.양재리.사당리.우면리.신원리.서초리와 같은 지역의 시흥리.독산리.신림리.봉천리.가리봉리가 서울시 영등포구에 편입되었고, “시.군 관할구역변경 및 면의 폐치에 관한 법률”에 의하여 시흥군 동면 안양리와 서면 박달리가 안양읍에 편입되었는데 안양읍내에 안양리란 지명이 있어 신안양리로 개칭되었다. 한편, 서울시의 구역확장으로 시흥군의 신동면 및 동면 일부가 서울시에 편입되자 동법률 제1175호에 의하여 화성군 일왕면의 고천리 등 9개리가 시흥군에 편입되면서 의왕면(현 의왕시)으로 개칭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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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고도의 경제성장으로 사회여건이 크게 변화되어 전답은 공장용지로 바뀌고 농촌은 도시로 전환로 전환되어 농촌인구의 도시집중이 가속화되었다. 이에 수도권의 합리적인 개발과 인구집중을 억제하기 위하여 서울외곽도시 육성도시와 수도권 인구분산을 용이하기 하기위하여 1973년 3월 12일 법률 제2597호 “시 설치와 군의 폐치 분할에 관한법률” 을 공포하여 “안양읍을 안양시”로 승격하여 같은 해 7월 1일 시행하게 되었다. 1912년 인구가 3464명에 불과하였으나 1949년 읍 승격 당시는 2만 26명 1957년 2만 2181명 이었으며,1960년에는 3만 1673명, 1970년에는 9만 1894명으로 급증하게 되었다.(서울대학교 규장각 책임연구원 이성임)

우리나라 처음으로 실시(1925년)된 “국세조사통계”에 의하면 시흥군 내의 10.9% 경기도내의 0.43%인 총1188가구에 인구 6165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 되었고 행정구역 통페합(1914년) 이후부터 1973년 시 승격 때까지는 시흥군에 편재되어 있었다. (서울대학교 규장각 책임연구소 이성임).

즉, 현재의 안양은 조선시대 과천과 시흥의 일부가 합쳐진 곳으로 행정적으로는 하나의 작은 리(里)에서 출발하여 큰 규모의 시(市)로 변천한 특별한 지역이고 현재는 IT의 메카 지역이기도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