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56

1970년대 안양4동에 있던 중앙교회

#안양 #기억 #기록 #안양중앙교회 #예배당 #안양4동/ 안양시 만안구 안양4동 장내로 125(중앙시장 화신로 입구)에 자리한 안양 중앙교회의 옛 교회당(1960-70년대) 모습으로 당시 종탑이 우뚝선 안양 장내동성당과 함께 예배당 교회탑이 높다란 안양읍내 어디서나 눈에 띄는 건물이었다. 이 사진은 1985년 5월 17일 발행된 안양 중앙교회 55년사에 수록된 것인데 사진속 교회 현판에 안양중앙교회로 명시된 것을 보면 '대한기독교장로회 안양교회'에서 명칭이 변경된 1968년 5월이후인 1970년대 초반에 찍은 것으로 보인다. 안양 중앙교회의 연혁을 보면 1930.5월 양동익 전도사(제1대교역자) 안양청년회관 안양교회 첫 예배를 드린 것을 시작으로 1930.10월에 시흥군서이면 안양리 632번지에 예배당을..

[기억-정진원]학의천은 알몸일 때까지만 벌모루 개울이었다

알몸일 때까지만 벌모루 개울이었다 청계산 청계사 옆 골짜기에서 시작된 작은 실개울 물은 상청계ㆍ중청계ㆍ하청계를 거치면서 물이 조금씩 불어나 한직골 옆에 이른다. 하우고개, 원터, 독쟁이 쪽에서 내려온 물도 한직골 조금 아래쪽에서 그 물과 합쳐졌다. 광교산 바라산 골짜기에서 흘러내린 물과 능안 쪽 모락산에서 내려온 물이 백운호수에 고여 있다가 무넘기를 넘쳐 내려서 삼벌내에서 다른 두 물줄기와 합해서 아래로 흘러내렸다. ‘삼벌내’라니, 세 갈래의 물이 합쳐져서 된 시내라는 뜻인가 보다. 이 물줄기가 양지편 앞, 벌모루 앞을 지나 흐르는데, 안양 쪽으로 흘러가므로 안양천이라 부르다가 지금은 학의천이라 한다. 덕장골 안의 두 실개울, 우리 집 옆을 흘러내린 물과 동편 사당골에서 흘러내린 물이 벌모루에서 학의천과..

[기억-조성원]60년대 국민학교 졸업 선물 '도장'

[조성원]60년대 국민학교 졸업 선물 '도장' (졸업과 도장) 우리 학교(안양초등학교)는 큰 강당이 있었다. 학예발표회라든지 영화상영 같은 많은 행사를 그곳에서 하였다. 나는 중앙에 두 번 서봤다. 한 번은 합주 반 일원으로 하모니카를 불기위해 올라갔으며 또 한 번은 졸업식 때 작은 상을 받기 위해 단상에 올랐었다. "빛나는 졸업장을 타신 언니께 꽃다발을 한-아름 선사합니다. 물려받은 책으로 공부를 하며 우리-는 언니 뒤를 따르렵니다." 이 노래를 부르면 눈물부터 주르륵 흘러내렸던 순순한 시절이 있었다 . 송사와 답사는 또 어떠하였던가. 강당 한구석에서 귀뚜라미 같이 엷게 훌쩍이던 소리는 어느 틈 개구리 울림통 마냥 일시에 터져 울음바다가 되었다. 요즘 아이들은 눈물은커녕 졸업노래를 아예 행사에서 제외시..

[기억-조성원]안양초-안양중-안양공고 축구의 배경

[조성원]안양초-안양중-안양공고 축구의 배경 (새학기) 방학숙제를 3일 만에 해치웠다. 그런 엉터리 숙제물이 전시하는데 뽑혔다. 나는 몰래 전시실에 들러 내 숙제 물을 꺼내왔다. 짧은 봄방학은 덤으로 얻은 것 같아 겨울 방학보다 더욱 고소했다. 그리고는 새 학기가 시작된다. 반 편성도 다시 하고 선생님들도 전근을 가시고 또 새로 전학 온 아이들도 생겨난다. 안양이 커져 가면서 갈수록 전학 온 아이들은 늘어만 갔다. 사투리가 심한 아이들은 입을 오므려가며 표준말을 하려했지만 그것이 곧 웃음꺼리였다. 새 반이 편성되면 서먹서먹하고 같은 반에서 올라온 아이들끼리만 어울린다. 한동안은 말 수 적어진 아이들로 교실은 조용하다. 탐색의 과정이 있다.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기 위해서는 누구든 그러한 과정을 거친다. 여..

[기억-조성원]학교급식 강냉이빵을 기억하나요

[조성원]학교급식 강냉이빵을 기억하나요 (강냉이빵) 내 나이 또래가 참 많다. 내 또래부터 학급수가 가히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하였다. 육이오를 겪은 당시의 소년소녀들이 첫 출산을 하던 때가 바로 내가 태어난 1957년 이후 쯤 되기 때문이다. 헐벗은 탓이겠지만 그 시절엔 고아들이 많았다. 고작 2만 명도 채 안 돼는 읍내이건만 우리 동네엔 유독 고아들이 많았다. 동네에 미군부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고아들을 돌보았었다. 고학년이 되자 한 반이 무려 칠팔십 명을 넘어섰는데 그중 대여섯 명은 고아원 출신 아이들이었다. 기독보육원, 평화보육원, 안양보육원. 안양에는 그렇게 세 곳이 있었다. 그 애들은 거의 대부분 생년월일이나 성조차 모르고 지냈다. 우리보다 훨씬 큰 아이들이 많았으며 여드름에 턱 ..

[기억-조성원]1960년대 끔찍했던 연탄가스의 기억

[조성원의 기억속 안양]1960년대 끔찍했던 연탄가스의 기억 (연탄 가스) 연탄하면 떠오르는 안도현의 시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삶이란 나 아닌 그 누구에게 기꺼이 연탄 한 장 되는 것' 그 시절 연탄만한 가치도 많지 않았다. 겨울이 되면 소외된 이들에게 여러 경로를 통해 전해지는'사랑의 연탄 나누기' 행사,' 연탄 배달의 봉사 이야기' 돈 몇 푼에 찾는 따스함이 어디 흔하였던가. 하지만 요즘 연탄은 사는게 구차하거나,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을때 연탄을 피워놓고 자신과 가족의 목숨까지 잠재우거나,남에게 치명적인 해를 가할 악의 형태로 연탄이 이용되기도 한다. 생을 연탄으로 마감한다니 정말 가슴 아픈일이다. 스스로가 아니라 생각지도 못한 죽음 , ..

[기억-조성원]1960년대 안양과 신작로 길

[조성원의기억속 안양]60년대 안양과 신작로 길 2-1 신작로 길 1 언덕너머에 신작로(新作路) 길이 생겼다. 동네 사람들이 다들 신작로라 불러서 나는 그 길 이름이 신작로인 줄 알고 지냈다. 우리 동네는 신작로 말고도 아래엔 아스팔트로 포장된 국도가 가로질러 있었다. 수원과 서울로 통하는 유일한 길이었다. 해마다 개나리 필 무렵 수원에 모 심으러 박대통령이 행차하는 날엔 우리는 그 길 변에 늘어서 박수를 쳤다. 그때는 그가 수원으로 향한다는 사실만을 알고 있었는데 후일 그가 간 곳은 농촌진흥청이고 권농일이라는 날짜에 맞춰 해마다 그곳을 향했다는 사실도 자연 알게 되었다. 안양에 유명한 갈비 집으로 ‘화진정’이란 곳이 역전에 있었는데 그는 당시 박통이 수원에 오면 으레 들리던 갈비집에 주방장 출신이라고 ..

[기억-조성원]1960년대 그 시절 안양과 복부인

[조성원의 기억속 안양]1960년대 그 시절 안양과 복부인 (그 시절 안양과 복부인) 가는 세월은 이정표 없이 무작정 달리는 기차와도 같다. 창문 틈에 비치는 풍경이 어제와 또 다르다. 가는 속도는 얼마쯤 되는 것일까. 안양을 떠난 지 햇수로 35년이 넘는다. 흘러간 세월만큼 너무도 변한 안양! 동구 밖에 포도밭 고추밭 냇가가 그대로 있는 정감어린 안양도 아닌데 지금도 여전히 애착을 느끼는 것은 왜일까. 내 삶의 깊이만큼이나 골 패인 마음, 어쩌면 고향 땅의 흙냄새, 그 순진함으로서 비로소 치유가 가능하다고 여겨서일지 모른다. 동심의 고향은 엄마의 품속 같고 따스한 정감을 지녔다. 하지만 잡다하다 싶은 작은 기억들은 그림자조차도 너무도 희미해 자꾸 맘속으로만 숨는다. 그러기에 잊을 건 잊혀지고 조용히 살..

[자료]원로에게 듣는 안양이야기

구술채록 그리고 기록으로 남기기 우리는 살아가면서 지식과 지혜, 새로운 정보가 끊임없이 필요하고, 또 이것을 다른 사람에게 전해주기도 합니다. 이러한 지혜나 지식을 얻고자 할때 종종 도서관을 찾게 되지요. 수많은 서적들이 가득한 도서관을 지혜의 창고라고도 하는데요, 이 많은 서적들은 어디서 나온걸까요? 바로 사람에게서 나온 것이지요.^^ “노인 한분이 숨을 거두는 것은 도서관 하나가 불타는 것과 같다” 20세기 검은 아프리카의 지성으로 불리는 소설가 ‘아마두 함파테바’는 1962년 유네스코 연설에서 한 사회에서 노인이 차지하는 중요성을 역설했다. 파편적일지언정 한 개인의 기억은 그 사회와 대중, 특정 집단의 기억이기도 하고, 이런 개인의 역사들이 모여 큰 그림을 이룰 수 있다. 이같은 역사는 현재의 거울..

1977년 안양3동 삼영하드보드와 당시 신문 광고

#안양 #삼진알미늄 #한국아트제지 #수암천 #채석장 #철길 #역사 #기록 #사진/ 안양의 원도심인 안양CGV사거리에서 삼덕공원을 지나 안양9동 새마을로 올라가는 길목으로 안양3동 수암천변에 있던 삼영하드보드(현 안양3동 우성아파트) 공장의 1977년 풍경으로 1977년 7월13일자 매일경제 1면 하단에 게제된 광고에 나오는 공장 모습이다. 삼영하드보드 공장은 안양3동 774번지 현재의 성원아파트 자리에 있었는데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인이 운영하던 내하목재회사가 있었으며 해방직후인 1946년 삼영하드보드가 설립되어 1980년대까지 화목과 폐목을 이용한 하드보드(천장과 바닥용)를 비롯 세미보드, 텍스 등을 생산하던 규모가 컸던 공장이었다. 특히 삼영하드보드의 광고(61년 6월 22일자)를 보면 삼영하드보드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