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임머신/옛사진읽기

1968년 안양 시대동과 태평방직 주변

안양똑딱이 2017. 10. 24. 1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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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양3동의 금성방직과 함께 1950-70년대 굴뚝공장 산업단지 안양을 상징하던 안양1동의 태평방직과 주변 시대동 풍경으로 당시 석수동 미군부대 전령으로 근무했던 닐미샬로프가 1968-1969년 겨울에 헬기에서 찍은 사진이다.

먼저 사진속에 안양 상공을 동시에 날고 있는 헬리곱터 한대를 설명한다. 이 헬기는 미국 보잉사가 개발한 대형수송헬기인 CH-47D 치누크 헬기(Chinook helicopter)로 1962년 실전 배치된 이후 50년이 지난 2012년까지 1,200여대가 생산됬고, 미국은 물론 우리나라도 포함하여 16개국에서 운영중인데 기록에 의하면 1968-69년 당시 석수동 군용지 안쪽의 미군부대가 관리하던 탄약창의 폭탄들을 운송하는데 사용됐다.

사진 아랫쪽의 단독주택들이 있는 곳이 안양 남부동(안양1동과 남부시장)이고 그 위로 오른쪽에 버스가 지나는 길이 서울과 부산을 연결하던 1번국도(현 만안로. 안양 토박이들은 현재 이길을 구도로라 부름)이며 그 위로는 경부선 철길이 지난다. 그 위로는 거대한 공장이 자리하고 있는데 금성방직과 상벽을 이루었던 태평방직으로 이 공장내에는 공장시설 뿐만 아니라 거대한 온실과 연못까지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공장 왼쪽으로 보이는 길은 안양에서 과천, 청계와 말죽거리로 연결하던 주요 도로였는데 가는 길의 주요지점을 보면 안양역에서 1번국도(구도로)에서 땡땡땡철길을 건너면 당시 시흥군사람들이 장보러 왔던 구시장이 나오고 태평방직 정문앞을 지나 수푸루지 다리를 건너면 임곡마을이다. 이곳에서 나즈막한 야산(현 이마트 건너편)을 돌아 다시 공동묘지가 있던 구릿고개(안양운동장남문, 임철호감자탕 앞)를 넘고 수촌마을 지나 인덕원으로 이어진다.
요 대목에서 살짝 귀띔하면 현재의 운동장치안센터 옆에서 관양동 노을어린이공원까지 이어지는 수촌마을의 뒷길(평촌대로 374번길. 관평로 305번길)은 조선시대 선비와 보부상들이 한양에서 남태령을 넘어 인덕원에서 안양과 안산으로 가던 그야말로 옛길을 유지하고 있다. 이 골목은 현재 안양1번가, 범계, 평촌에 버금갈 만큼 식당과 숨은 맛집들이 자리한 동네 번화가로 자리잡았다.
사진속 철길이 지나가는 왼쪽 끝으로 대형 건물이 보이는데 쌀 창고가 있던 삼광정미소다. 당시 안양역 앞(현 현대코아 자리) 에는 삼창정미소가 있었는데 이 두개의 정미소들은 정부양곡을 도정하고 보관하는 영단(營團)방앗간으로 규모가 아주 컸다.
삼광 정미소앞에는 넓은마당이 있었는데 어릴적 구시장에 살던 동네 꼬마들의 집합소로 구슬치기, 딱지치기, 사방치기, 술레잡기, 자치기, 말뚝받기 등을 하며 놀던 모습들이 떠오른다.
사진 중간의 공장 왼족 끝자락에 보이는 다리가 안양과 비산동, 인덕원, 청계와 과천을 연결하던 수푸루지다리다.

 

수푸루지다리와 임곡부락 이야기
수푸루지 다리는 안양읍내에서 구시장-비산동-관양동-인덕원-청계-과천을 지나 서울 말죽거리로 연결되던 중요 교통로였다.당시에는 비산대교가 가설되기 이전이라 안양읍내에서 안양천을 가로지르는 유일한 다리였다. 현재의 다리는 매우 넓지만 과거에는 버스가 겨우 한대 지나갈 정도에 다리 난간도 없어 다리를 건너다 버스가 오면 다리 아래 하천(그때는 물이 참 많았음)로 떨어져 물에 빠지기도 했지요. 이 다리는 1977년 수해때 중간이 짤려나가 비산동과 임곡마을 사람들이 안양읍내로 나오기 위해 줄배를 타고 하천을 건너기도 했다.
수푸루지다리를 건너 집들이 보이는 곳이 수푸루지 마을 또는
임곡부락이라 불리웠던 곳인데 안양천변에서 망해암으로 오르는 안쪽까지 면적이 매우 넓었다.
왼쪽 산자락(판잣집들이 있는 곳_ 현 대림대학) 뒷편의 마을은 가장 먼저 임곡1지구 재개발을 통해 2003년 입주한 아파트단지(주공그린빌)가 들어서면서 옛 흔적은 사라졌다.
수푸루지 다리(임곡교)를 건너 단독주택들이 밀집한 곳 또한
임곡2지구 재개발을 통해 아파트단지(임곡휴먼시아)로 바뀌었고 다리 오른쪽 동네는 비산동성당 주변인데 이 곳을 포함하여 남은 단독주택 주거지 전체가 임곡3지구 재개발을 통해 아파트단지로 바뀔 예정으로 대다수 주민들이 이주하고 이제 불과
10%정도만이 살고 있어 이제 얼마 지나지 않아 과거 숲이 무성하게 우거져 아름답던 수푸루지 마을에서 엣 흔적을 볼 수 없게됐다.

 

태평방직 이야기
사진 중앙의 면적이 거대한 공장은 태평방직이다. 이 공장은 1953년에 자본금 1억환으로 안양읍 안양리 97번지 일대에 설립된 삼흥방직이 전신으로 당시 방기 1만추, 직기 50대를 구비하고 1954년 10월부터 생산을 시작한다. 하지만 자금사정을 겪자 안양3동에 있는 금성방직이 1956년 5월 15일 인수하면서 공장은 다시 기운차게 돌아갔다.
당시 금성방직과 태평방직은 지역경제를 살리는 대표적인 기업으로 두 공장에서 일하는 수많은 여노동자를 일컬어 금성방직과 태평방직은 1960-70년대 안양 경제발전에 지대한 공을 세운다. 당시 두 공장에만 3천여명의 여성노동자들이 일해 월급날에는 안양시내 식당과 술집이 호황을 누릴 정도로 봉급 특수가 안양경제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에 금성방직과 태평방직의 3천 궁녀가 안양을 먹여살린다는 소리가 오랫동안 회자될 정도로 안양사람들의 기억에는 거대기업이었다.
특히 태평방직과 금성방직은 안양의 인구를 증가하는 계기도 만들었다. 1960년대 당시 안양시 인구는 불과 5만여명 정도에 불과해 공장에서 일할 인력이 태부족했다. 이에 두 공장에서는 수시로 지방으로 내려가 일할 사람을 모집했는데 보릿고개로 어려웠던 시기였기에 중학교를 갓 졸업하면 취업이 가능했다. 이에 충청,전라,경상도에서 안양으로 상경한 이들이 많았는데 그중 가까운 충청도에서 올라온 이들이 많았다. 이들은 안양에서 남자를 만나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리기도 했지만 오빠, 삼촌 등 형제 친척들까지 안양으로 불러오는 계기도 만들어 현재 안양에 팔도민이 골고루 분포돼 있고 타 위성도시와 달리 팔도향우회가 매우 활성화 된 것도 하나의 배경이 아닐까 싶다.
이같은 배경은 안양시 인구수에서도 나타난다. 1941년 10월 1일 시흥군 서이면이 안양면으로 개칭되었던 당시의 인구는 10,000명, 1949년 8월 15일 안양읍 승격 당시 인구는 20,021명에 불과했는데 많은 굴뚝공장들이 들어선 이후인 1973년 7월 1일 안양시 승격 당시의 인구는 111,075명으로 무려 9만여명이나 증가했다.
태평방직은 1967년 10월 금성방직과 함께 대한농산(대농)에 매각되고 한국토지금고에 의해 택지개발을 통해 대규모 아파트단지가 들어섰는데 1983년 신축한 진흥아파트(5층/12층. 33개동
1940세대)로 지어진지 30년이 지난 지금은 건물의 노후화로 인해 재건축이 추진중에 있다.

 

구시장(안양시장)과 시대동 이야기
구시장(안양시장)은 1920~1960년대 말까지 안양에서 가장 번화가였던 곳으로 1960년대 초반 새시장(현 중앙시장)이 생긴 이후에 옛 지명으로 시대동(市垈洞)이었던 이곳을 사람들은 구시장이라 불렀다.
구시장은 1926년 1월 28일로 개시됐는데 호계동에 있던 군포장이 쇠퇴하면서 활기를 뛰기 시작했지요. 즉 1905년 안양역이 문을 연 이후 안양이 근대도시로 서서히 꿈틀되기 시작한 것이다.
기록을 보면 군포, 의왕, 과천, 광명, 수암, 군자등에서 이곳으로 장을 보려 올 정도로 농산물, 축산물, 포목, 일용잡화까지 거래되는 품목이 아주 다양했다고 한다. 1929년에는 안양지방에서 전기가 최초로 송전된 곳이 이곳이며. 내년 안양씨름대회가 열려 1등에 황소1頭, 2등에 광목 1疋이 상품으로 수여되기도 했다.
하지만 구시장은 1961년 11월 6일 안양4동에 새시장(현 중앙시장)이 조성된 이후 점차 쇠퇴하기 시작한다. 그래도 역이 가깝고, 당시에는 과천과 말죽거리까지 가는 버스들이 이곳을 지나갔기에 1960년대 말까지는 유동인구가 꽤 많았던 곳이다.
엣 지번으로 경기도 시흥군 안양읍 시대동 92번지 일대인 이 곳은 1997년 주거환경개선지구로 지정돼 당시 주택공사에 의한 주거환경개선사업을 통해 20∼25층(1천93세대. 2004년 입주) 주공뜨란채 아파트단지가 들어서 과거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