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임머신/옛사진읽기

1960년 초반 안양 금성방직에서 일했던 얼굴들

안양똑딱이 2017. 4. 22. 13:14

 

#안양 #금성방직 #안양3동/ 1960년대 초반 금성방직에서 일했던 얼굴들
1960년대 당시 안양에서 가장 규모가 컷던 굴뚝공장인 금성방직의 의무실, 노동조합, 온실, 정문 안쪽 잔디밭 등에서 당시 근무했던 직원들의 모습으로 안양2동 주민자치위원회에서 주민참여예산사업으로 '옛 사진으로 보는 안양의 재발견' 두번째 자료집 <내고장 안양2동의 흐름!> 사진첩 발간을 준비하며 주민들로 부터 수집한 사진으로 박영호님이 기증한 사진입니다.

사진속에 등장하는 금성방직 부지의 역사는 참으로 사연이 많은 곳입니다. 현재의 안양3동 국민은행 안양지점과 왕궁예식장 뒷편에서 박달동 우성아파트에 이르는 면적을 차지해 공장 담벼락을 따라 한 바퀴 돌려면 십리길을 걸어야 한다고 말할 정도로 안양 도심의 중심 대부분을 차지했습니다.
금성방직은 경북 달성군 현풍 출신으로 향후 쌍룡그룹 창업주가 된 김성곤 씨가 1940년 비누회사인 삼공유지합자회사를 설립, 크게 성공한 후 안양3동이 있던 조선직물을 1948년 10월 5일 인수해 1949년 3월 10일 공장을 준공하면서 시작되지요. 
원래 조선직물은 일본인이 경영하던 회사였는데 광복이 되고, 한국 최초의 면방기술자인 이강현이 조선직물의 관리를 맡아 수원 등지로 흩어진 직기 등을 안양으로 운반해 설치하여 가동을 시작했는데 건물이 방대해 운영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한국 재벌형성사(이한구 지음. 비봉출판사)에 따르면 태평양 전쟁말기 일본정부는 연합군의 일본 폭격을 피하기 위해 일본내의 주요한 산업시설을 한국으로 피신시켰다. 이에 해방직후 안양역전에는 일본방적 소유의 방적기 2천추가 그대로 방치되고 있었다네요.
김성곤은 방치된 방적시설을 이용하여 공장을 설립하기로 결심하고 관할관서인 미 군정청과 교섭하여 안양에 소재한 조선직물주식회사(조선비행기주식회사)의 일부인 3천평을 임차받아 인견사 생산공장에 나서는 것이 금성방직 안양공장의 시초이지요.(쌍용그룹 전사편)
김성곤은 기술자를 대동하고 안양역전에 나뒹굴고 있는 기계부품의 목록을 작성하여 미 군정청 관재처에 제출하여 사용 가능한 431대를 확보해 불하 받은 후 공장 귀퉁이에 설치하였으며 불하금액은 당시화폐로 2천만원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6.25전쟁으로 잿더미가 되고 말지요. 실의에 빠진 김성곤은 정부에 요구해 결국 UNKRA(유엔 한국부흥위원단) 자금 지원을 통해 1953년 6월에 재건에 나서 영국에서 기계를 구입하는 등 1954년 5월에 '은하' 상표의 면사 첫제품을 생산합니다. 이렇게 각고의 노력으로 잿더미 위에서 소생한 금성방직의 새 상품은 품질도 우수했지만 시장 사정도 좋아져 없어서 못 팔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빈다. 이익이 발생하면서 면직기를 늘리기 시작했고 목, 옥양목, 포플린 등 인기 있는 제품도 출시하면서 그야말로 엄청난 호황을 누리지요.

김성곤은 1956년 5월15일 안양1동 현 진흥아파트에 자리한 태평방직을 인수하고 공장 확대에 나섭니다. 태평방직은 1953년에 자본금 1억환으로 안양읍 안양리 97번지 일대에 설립된 삼흥방직이 전신으로 방기 1만추, 직기 50대를 구비하고 1954년 10월부터 생산을 시작하였으며 자금사정을 겪자 금성방직이 인수한 것이지요. 금성방직과 태평방직을 소유했던 김성곤은 이때부터 금성재벌로 불리우며 유력한 재벌로 성장합니다.
금성방직과 태평방직은 1960-70년대 안양 경제발전에 지대한 공을 세웁니다. 3천 궁녀(?)가 안양을 먹여살린다고 할 정도였지요. 당시 월급날에는 안양 일번가 식당과 술집이 호황을 누릴 정도로 봉급 특수가 안양경제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지요.
특히 충청,전라,경상도에서 상경한 여성 근로자들이 남자를 만나 결혼을 하고 형제 친척들까지 안양으로 올라오는 배경으로 인해 현재 안양에 팔도민이 골고루 분포돼 있고 타 위성도시와 달리 팔도향우회가 매우 활성화 된 것도 하나의 이유가 아닐까 싶습니다.

금성방직은 1963년 금성방직 축구단을 창단하여 운영하기도 했는데 공장안에 있던 축구장은 국내에 단 3곳밖에 없던 잔디구장으로 국가대표팀도 이곳에 와서 연습을 하면서 잔디구장 경험을 쌓기도 했었지요. 금성방직 축구단은 1967년 금성방직이 대한농산(대농)에 매각되면서 쌍용양회 축구단으로 운영되다 해체되고 맙니다. 
김성곤은 1962년 (주)쌍용양회공업을 설립하고, 1967년 동해군(현, 동해시)에 쌍용양회시멘트공장 건립 자금 조달을 위해 금성방직을 태평방직과 함께 대한농산(대농)에 매각하는데 금성방직은 1972년 태평방직과 합병되어 금성방직이란 이름은 사라졌으며 1973년 주식회사 대농으로 변경됩니다.

이후  두 공장은 1977년 한국토지금고에 매각되고 이후 일반에 매각되면서 안양 최초의 대규모 분양형태의 주택단지가 들어섭니다. 지금도 금성방직이 있던 안양3동 동네를 대농단지라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