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지역얘기/담론

[조성현]안양문화논단-안양 옛호랑이의 발자취를 찾아서

안양똑딱이 2017. 4. 20. 20:24

안양 옛호랑이의 발자취를 찾아서...
안양문화유산해설사 조성현

 

2015 석수동 쌍산신제(洞祭,일명 산고사)의 일환인 할아버지산 대동산신제(마을제사)가 음력 시월 초사흘일인 지난 10월 14일 열렸다.

무량사(구,약수암) 뒤편 삼성산 산중턱에서 수백년 간 제를 올려온 무형문화유산이지만, 금번행사는 우중(雨中)이라 삼성산 무량사 법당 내, 신선과 호랑이가 그려진 산신탱화가 걸려있는 산신단 앞에서 산신령께 정성들여 제물을 공양하고, 안양초교를 다니신 적이 있는 안양출신 혜천 스님(무량사주지, 75세)의 염불 및 축원으로 산신제 제례행사는 진행됐다.

산신탱화는 신선과 함께 호랑이를 그렸는데, 사찰 내 산신각은 불교가 토착신앙을 포용한 사례라고 볼 수 있다. 호랑이는 산의 신령으로 존경을 받았고, 우상숭배(신앙)의 대상이 되었다. 민화에 호랑이가 흔히 등장하는데 우리조상들은 해학적 필력으로 호랑이를 그렸다.

한편 안양시 관양1동의 마을 민속신앙인 수촌마을 도당제(都堂祭)는 산에 대한 신성함과 호랑이의 화를 두려워해 지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즉 호랑이가 안양에 서식했음을 추론해 볼 수 있는 대목이다.

관악산 큰 골산에는 당집(웃당)이 있으며 제단석(중당)과 마을에는 성황나무(당나무)와 함께 아랫 당(하당)이 있어, 지금도 3당에서 당제를 지내오고 있다. 도당제의 주신(主神)은 관악산 산신령이며 당집(웃당)에는 호랑이 그림이 있던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도당제와 관련하여 호랑이 관련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는데, 「제사음식에 손을 덴 제관은 잘못을 호랑이에게 싹싹 빌었다. 그렇게 한참을 머리를 조아리며 빌고 나서보니 호랑이는 담장을 넘어 사라졌다」고 하는 안양의 전설이 있다. 호환을 방지하고자하는 민간신앙의 모습을 보이는 ‘도당제(마을제, 제례의식)’로 볼 때 안양지역은 과거 호랑이의 출몰이 잦았음을 알 수 있다.

2015 안양의 마을제 제례의식(洞祭, 수촌마을 도당제/ 석수동 쌍산신제)이 호랑이가 연관됨에 착안하여, 문헌 속 호랑이를 뒤지는 등 안양의 호랑이의 실체를 찾아 고찰하고자 한다.


삼성산과 연결된 관악산의 남태령(南泰嶺) 쪽 고개는 경기도 과천에서 서울로 넘어 가는 길목으로 옛날 관악산 호랑이가 나오는 고갯길로 유명한 곳이다(출처: blog.naver.com/55072381/22000668619). 남태령은 옛날 한성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이 모여서 넘은 험한 고갯길로 알려져 있다.

동네에 구전으로 예전부터 내려오는 남태령 호랑이에 관한 전설(출처: blog.daum.net/lineme/10596936 남태령 전원농장 블로그 내 검색)이 있다. 남태령 인근에는 범바위, 호랑이굴(관악산 쪽) 등 호랑이에 대한 이름이 유독 많았었는데, 그 흔적은 호랑이의 배설물과 발자국으로 짐작해 볼 수 있었다고 한다. 특히 눈이 오는 겨울철에 남태령 고개주변에서 호랑이 발자국이 많이 발견되었는데, 호랑이의 발자국은 다른 동물에 비해 유난히 크다.(농부의 지혜 2007.02.05).

남태령과 연접하여 관악산이 있는데, 산에는 조선시대 절터인 관악사지(冠岳寺址, 경기도기념물 제190호, 과천시 중앙동 산12-1번지 소재)가 남아 있다. 관악사지 소개 안내표지판에 따르면 용과 봉황을 새긴 다수의 막새기와가 출토되어 왕실과 밀접한 연관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에 “명종(明宗) 5년(1550) 관악사의 승(僧) 계은(戒圁)이 호랑이 가죽을 바쳐 상을 주었다”기록이 있음으로 보아 관악사 주변(현,연주암 인근)에는 호랑이가 실존했음을 문헌 속에서 확인할 수 있다.

안양시 지명유래집(이승언 저/1996년 12월 발행, 새안양회)을 살펴보면(219쪽) 시흥군 태생 이윤회(李潤會)가 관악산에서 새벽에 우연히 만난 호랑이(大虎) 목격담을 소개하고 있다. 이상오 「사냥, 1964」를 인용한 글을 살펴보면, 「이옹(李翁)이 어느 날 새벽 관악산에 오를 때 큰 호랑이 한 마리가 잔디밭에 아침 해를 바라보며 앞발과 뒷발로 번갈아 가며 땅 바닥을 긁어 먼지를 날리며 갑자기 으르렁 거린다」고 소개하면서, “범의 소리는 산천을 진동시켰다.”고 기록하고 있다. 관악산의 연봉인 삼성산 일원에도 호랑이가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안양시 석수동 안양예술공원 초입 고려안양사지(구,유유부지/현,김중업박물관) 매장유물 시·발굴조사과정(2008~2011)에서 철제동물장식인 ‘철마(鐵馬, 철제말 장식)’가 한쪽 뒷다리가 결실된 채 2점이 출토되었다. 금속장식구류인 철마는 말의 형태를 본 따 용해된 철물을 부어 주조한 것을 말한다. 철마장식(금속유물, 안장이 있는 철마)두 점 모두 견고하게 주물로 만들었기에 자연 상태로 한쪽 다리가 일괄 결실되기는 어렵다고 판단되며 고의로 2점의 철제마(장식물)에 강한 물리적인 충격을 주어 다리를 부러뜨린 것으로 보인다. 이는 다리가 자연적으로 부러졌다기보다는 고의로 부러뜨린 듯한 인상이 강력하게 풍긴다.

고려시대 안양사지에서 출토된 뒤쪽 다리가 부러져 결실된 철마(高麗鐵馬, 동물상 2점)의 실체는 제사 및 신앙의 대상으로 호환(虎患)면피 및 무탈, 무병 등 안녕을 기원하는 민간신앙의 역할과 기능을 한 것으로 분석된다. 철마는 철제로 만든 말(철마)의 다리를 분질러 잘라 (호랑이에게)던짐으로서 함께 액운(재앙, 화)을 던져 버리기 위한 상징물로 제작한 것으로 보이며 또한 동시에 무탈, 무병과 복(안녕) 등을 기원하는 원시기복신앙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안양시 김중업박물관 부지일원에서 출토된 용도미상의 철마의 실체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으며 김중업박물관 일원, 고려안양사지 출토 철제마편에 대한 고찰을 통해 안양예술공원 삼성산일원에 호랑이가 서식했음을 유추해볼 수 있다.

한편 안양예술공원 초입 김중업박물관 인근에서 과거 포도농사를 지으셨고, 현재도 거주하시는 필자의 부친 조재익(曺在益, 1938년생/前,삼성산경로당 회장)은 어릴 적 동네 어르신으로부터, “관악산에 호랑이가 있어 호랑이가 두려워(호환) 내려왔다”는 말을 회고로 풀어내시면서, 관악산에 호랑이가 있다는 예기를 들었다고 말했다. 또한 바로 이웃으로 석수동 회화나무(수령 360년, 마을나무)옆에 사는 유만석씨(삼성초 졸업/건축업종사)도 ‘안양 호랑이’를 어르신으로부터 들은 바 있다고 피력했다.

안양예술공원 토박이인 이재신(삼성초 23회)씨는 안양의 호랑이 이야기를 아버지로부터 들었는데, “안양파빌리온(구,알바로시자홀)앞 삼성천 건너 삼성산 일원 계곡에는 예로부터 호랑이와 늑대가 출몰한다고 여겨, 아버지는 호환 등이 두려워 그 지역에 절대 가시지 않았다”고 증언했다.

김승우씨(삼성초 24회)의 모친은 “옛날 삼성산에서 늑대소리를 들었다”고 하시면서, 약 50년전 새벽시간대 시어머니께서 삼성산 삼막사마당에 남아있는 호랑이 발자국을 보고, “시어머니가 산신령이 왔다 갔다 보다”고 말했다고 한다.

(사)한국전통민족종교총연합회 한상윤(삼성초 22회 졸업/삼성초총동문회 사무총장) 본부장의 모친(75세)이 약 65년 전, 경인교대 위쪽 삼막사가는 길목인 삼성산 중·하류 삼막천 계곡에 위치한 속칭, 사슴메장(사슴목장)인근에 땔나무하러 갔다가 호랑이를 목격했다는 제보도 있다.

사슴메장 부근 계곡일원은 삼막천 상류계곡의 맑은 물과 주변의 많은 바위 및 호암산과 삼성산, 관악산으로 연결된 산림벨트로 연결되어 있어, 호랑이 서식환경이 양호하여 과거 제법 호랑이가 있을 법한 느낌이 있는 으쓱한 계곡이다.

안양9동 병목안 출신인 김정대(靑土, 金正大, 1938년생) 안양문화원 고문은 병목안 석탑 인근 “칠읍골에 호랑이가 내려 왔다”는 예기를 선친으로부터 들었다고 한다.

삼성산이 감싸고 있는 안양지역은 호랑이(범)와 관련된 지명이 유독 많이 남아 있어, 과거 호랑이의 출몰이 흔히 있던 것으로 보인다. 호랑이관련 지명으로는 호계동(虎溪洞), 범계동(평촌), 호현(虎現)마을 및 범고개(박달2동) 등이 있다.

새안양회 발간, 안양시지명유래집(이승언 저/1996년 12월 발행)에 따르면 호현마을은 안양에 마지막 남은 자연부락중 하나로 시흥시와 경계인 범고개 북동쪽에 자리한 마을이다. 자연 고개지명, 범고개는 범(호랑이)의 서식과 관련되어 탄생된 것으로 보인다. 예전에는 오지마을로서 고개가 험하고 으슥하여 강도나 도둑들이 득실거려 ‘도둑놈 고개’라고도 불렸다.

이 고개에 대해 전해지는 이야기는 여러 가지가 있다. 조선조 중엽 범고개 마을의 윤씨 성(파평윤씨)을 가진 한 부자의 시종(하인)을 호랑이가 물고 목감동 방면으로 고개를 넘어 간데서 전래됐다는 설과 고개 중턱에 다리를 구부리고 앉아 고개 길을 보고 있는 호랑이 모양의 바위에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다.

일제 강점기 초까지만 해도 고갯길이 험하고 나무가 울창해 호랑이가 살고 있다고 여겨, 고개를 넘어가려면 어른 5명 이상이 모여야 지나갔다고 한다. 이런 점으로 종합해 볼 때 사견이지만, 일제 강점기 즈음까지는 우리안양에 호랑이가 실존했음을 추정해 볼 수 있다. 근대에는 음력 10월 2일 요골초입에 있는 소나무아래서 산신제를 지냈다고 한다.

안양시 호계동(虎溪洞)의 유래는 예전에는 방축(防築)말(마을), 샛터(新基)말, 안말(內村)일대가 범(호랑이)이 많은 곳이라 하여 호계(또는 범계)라 칭한대서 유래한다. 이곳은 들판과 골짜기 야산이 있어 자연초목이 어우러져 맹수의 서식환경이 양호하여 냇가에 범(호랑이)이 많다하여 범계(또는 호계)라고 불렀고, 이를 한자화하면서 호(虎)계동이 됐다.

범계는 호계의 다른 이름이라고 볼 수 있다. 범계는 호계(虎溪)의 호(虎,호랑이)를 순 한글 말로 표기한 것이고 계(溪.골짜기)는 골짜기를 의미하므로 호랑이가 많은 골짜기를 ‘범계’로 풀이할 수 있다. 범계동은 평촌신도시가 들어서면서 1985년 11월15일 호계 3동에서 분동됐다.

한편 조선시대 조종경(趙宗敬,독암,1495~1535)이 지은 문헌(독암유고) 속에 안양 호랑이가 등장한다. 조종경(연산군1~중종30)은 후대 선비들이 그의 정절과 충직을 숭앙하여 호계서원에 배향된 인물로 호가 독암(獨庵)이다. 조종경은 말년 안양(호계동)에서 생애를 보내며 시어 속에 안양 호랑이 관련 글을 남겼다.

조종경의 정적 김안로(金安老,1481~1537)는 문정왕후(文定王后, 중종 제2 繼妃 尹氏)를 폐하려다 실각하여 1537년(중종32) 진도로 유배된 이후 김안로가 사사(賜死)되자, 조종경은 신원되어 도승지에 추증되었고 과천현 호계서원에 제향 된다.

김계명(金啓明) 등의 상소에 의해 숙종7년(1681) 또는 숙종42(병신, 1716)창건된 호계서원(창강서원)의 제향인물은 조종경(독암, 趙宗敬,1495~1535)과 조속(창강, 趙涑, 1595~1668)이다.

호계서원(虎溪書院)은 과천현 유생의 상소로 (독암)조종경과 그의 증손자 (창강)조속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고 제향(祭享, 제사)을 올리기 위해 안양의 호계동 일원(현,안양장례식장 인근)에 창건되었으며, 창강서원(滄江書院)이라고도 한다. 한편 조선총독부 초대 서이면장을 지낸 조한구(趙漢九, 1833~1965)는 고종 20년 출생한 인물로 독암 조종경의의 후손이며 창강 조속의 10대손이다.

김안로 일당의 탄핵으로 관직에서 은퇴 후 말년을 과천현 호계리 ‘호계촌사(별장)’에 거주하면서 시어를 읊조리며 유유자적하게 생을 마감한 조종경. 호계촌사(虎溪村舍, 시냇물이 있는 산골짜기에 지은 별장)에 은둔하면서 떠오른 시상을 읊조리며 남긴 한시 독암유고 209편 중 40여 편의 작품이 시어로 또는 제목으로 ‘호계촌사(村舍)’, ‘호계(虎溪)’, 연관단어(溪邊, 山亭 등)들이 흔히 등장(예시, 吾廬正住虎溪邊, 내 집은 바로 호계가에 거주하니)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시어의 제목으로 ‘호계유려’(虎溪幽廬, 호계촌사에서), ‘호계우음(虎溪偶吟, 호계촌사에서 우연히 읇조리며)’등 ‘호계’가 들어간 한시가 유독 많다. 독암은 그의 삶의 터전인 ‘호계’ 관련된 글을 다수 남겨 안양시 호계동을 지극히 아끼고 사랑했던 조선시대 지역의 선비임을 알 수 있어, 독암과 호계서원을 주목된다. 안양지역 유일한 서원인 옛,호계서원의 위치는 안양시 문화관광과, 김지석 문화재전문위원에 따르면 외곽순환도로 북쪽으로, 안양장례식장 뒤편의 사유지라고 한다.

여지도서(與地圖書, 영조 1757이후)에는 '창강서원은 과천현 서쪽 15리 되는 호계리에 있다'라고 명시한 문헌속 기록으로 보아, 또한 말년 낙향 후 '호계촌사'라는 별장을 짓고 당시 '호계'의 모습을 서정적이고 낭만적인 언어로 그려낸 조종경의 생몰당시(연산군1~중종30) 및 영조 때 사용하던 조선시대 '호계'라는 지명은 오늘날까지 수백년간 그대로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독암유고에 자주 등장하는 ‘호계’라는 지명 및 시어 속 ‘호랑이’로 보아 독암유고를 저술한 약 500년 전, 조종경(연산군1~중종30)의 생몰(약 480~520년전)당시, ‘과천현 호계리’라는 지명은 일반적으로 사용된 것으로 보이며, 당시에는 호랑이가 지역에 많이 있었고 오늘날 ‘호계’라는 행정지명도 호랑이와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여겨진다.

조종경의 독암유고 속 옛 시문에 ‘촌사즉사(村舍卽事, 시골집에서 문득 생각나서)’편에는 한시 속에 “아침에 해가 뜨면 울타리가에 호랑이 자취 많다”는 시어가 등장(원어: 일출이변다호적:日出籬邊多虎跡)하는 문헌상의 정황으로 보아 조선시대 호계서원이 있던 호계촌사(별장) 주변(매봉산, 지금의 안양시 호계2동, 안양장례식장 인근)은 예로부터 호랑이 출몰이 잦았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 한국호랑이(아무르호랑이 또는 시베리아호랑이)는 극동 러시아에 약 400마리 정도만 마지막으로 살아남아 한국호랑이의 명맥을 잇고 있다고 한다.

2015 안양의 마을제(洞祭, 수촌마을 도당제/ 석수동 쌍산신제)가 호랑이가 연관됨에 착안하여 부족하지만, 안양토박이 원로 및 지인들의 호랑이 증언, 독암유고 등 조선시대 문헌, 안양시지명유래집 등 근·현대 문헌 기록, 마을민속 문화(洞祭, 마을신앙)연구, 안양의 전설 및 지명유래 고찰, (안양시 석수동 김중업박물관 내)안양사지출토 철마고찰, 안양시간행물 ‘우리안양(vol.238)’, 인터넷 검색 등을 토대로 안양호랑이의 실체에 대해 살펴보았다.

앞으로도 안양의 호랑이 관련 연구가 많았으면 좋겠다. (조성현 안양문화유산해설사)

 

<사진설명>

▲맹호도(猛虎圖/그림 상,하)는 전통사찰 관악산 불성사(벽화)에서 촬영한 호랑이사진

<맹호도 猛虎圖 사진제공, 하단 호랑이 전신상, 김용학 삼성초등학교 총동문회장

/우측 상단 호랑이 두상, 목진선 안양시 총무과장>

▲산신탱화(좌측상단, 그림)는 안양예술공원 초입 삼성산 무량사(주지 혜천스님,75)의 법당내 산신단에서 촬영한 사진


<사진설명> 고려안양사 출토 철마(철제마편)의 양상(2점), 자료제공 안양시

▲김중업박물관 일원, 안양사지 발굴 시, 매장 출토되는 철마의 양상 및 모습(상단그림, 좌우)

▲보존처리를 거친 후 철제 동물장식의 양상, 두 점 모두 뒷다리 결실(하단그림, 좌우)

<문헌자료>

▲안양호랑이가 등장 하는 옛 시문 소개(자료제공: 안양문화원)

호계서원에 배향된 역사적 인물인 조종경의 독암유고(獨庵遺稿, 34쪽)속 옛 시문, ‘촌사즉사(村舍卽事)’편 한시 속에 “아침에 해가 뜨면 울타리가에 호랑이 자취 많다”는 시어가 등장 (번역: 김정석 국문학박사/경기향토문화연구소 연구위원, 다음카페 ‘수일재’운영자)

제목, ‘촌사즉사(村舍卽事, 시골집에서 문득 생각나서)’

‘잔성회수의망년’하고

‘토박민빈고소전’이라

‘일출이변다호적(日出籬邊多虎跡)’하고

‘초황교외소인연’이라

‘가감서리징조지’나

‘미인촌맹걸미련’이라

‘득지당년나식차’리오

‘여금기축유풍년’이라


<참고문헌>

1. 안양시지명유래집(이승언 저/1996년 12월 발행, 새안양회)

2. (통권)안양문화 11호(편집위원장 김정석/2012년 12월 발행, 안양문화원)

3. 안양의 마을제례(편집위원장 고정웅/2014년 12월 발행, 안양문화원)

4. 안양시 소식지(간행물), ‘우리안양’, 2015년 9월호(vol.238, 안양시) 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