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지역얘기/담론

[조성현]안양의 명물, 안양포도에 대하여

안양똑딱이 2017. 2. 18. 20:17

 

가을포도가 제철을 맞았다. 요즈음 안산대부포도축제, 안성마춤포도축제 등 포도를 콘텐츠로  한 향토축제 개최로 지역의 활력이 샘솟는 고장을 보면 부럽기 만하다. 경기도 안성은 포도축제를 ‘안성포도박물관’과 연계할 정도로 포도가  성황이며, 또한 포도 관련 인프라를 갖추고 있다. 과거 안양은 포도의 대표적인 고장으로 기억되는 곳이었다.  하지만 옛 명성을 추구하는 안양포도가 안산, 안성, 천안, 송산 등 다른 지역 출신의 포도로 대처되어 소비되고 있고, 현재 안양은 포도를 테마로  한 축제를 벌일 정도로 상황이 그리 녹녹한 상태는 아니다.  안양하면 포도가 연상될 정도로 성가를 누리며, 당시 손꼽히는  포도 주산지였지만 자라나는 청소년들은 그러한 사실을 알리 없고, 기성세대도 아련한 기억 속에서 흐릿하게 잊혀져가고 있으며, 안양시민 대다수가  이젠 안양포도에 대해 관심조차 없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다. 안양포도를 여간 접하기 힘든 현실 속에서, 자라나는 청소년들을  비롯하여 안양의 ‘포도미술제’행사에 참가한 신세대들은 왜 안양에서 포도를 테마로 한 예술행사를 개최할까? 라는 의문을 품을 여지가 있다. 하지만  안양도 과거 포도의 고장이었던 흔적이 아직까지도 남아 있다. 금번 초가을, (사)한국미술협회 안양지부 주관 및 안양시  후원으로 9월 10일부터 일주일간 개최된 ‘포도미술제’예술행사, 안양시의 상징 마스코트로 ‘포동이(시청 홈피참조)’사용, 안양시 호계3동  자연마을 ‘포도원’지명, 안양시청 홈피 안양의 명물, ‘안양포도’소개 등은 과거 안양이 포도의 고장임을 알려주는 흔적이다. ‘안양포도’는 안양시  선정 ‘2008안양의 자랑거리’ 49가지 중 한가지로 선정된바 도 있다.  경향포도협동조합이 1950년대에 이르러 처음으로 포도를  판매하기 시작한 이래 호계동 포도원일대 등이 포도단지로 변모하여 포도산업이 성가를 누렸지만 ‘포도원’은 아쉽게도 포도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고  현재 자연지명만 남아 있다.  안양의 도심인 만안구 중앙로  (안양우체국사거리)포시즌코리아웨딩, 안양샘병원 주변 및 (벽산로)중앙시장 쪽 일대 등이 포도밭으로 성황을 이루었으며, 과거 시흥군 시절 석수동,  안양2동, 안양7동(덕천마을), 박달동, 비산동(내비산마을), 관양동, 호계동(포도원지구) 등지에서 대다수 농가가 포도를 재배하여 포도가 안양에  흔해 넘쳤다. 안양시는 과거 포도재배단지 많았고 지역경제에 차지하는 비중이 컸다는 예기이다.  안양포도의 산출량이 중앙언론(매일경제 1967년 07월  14일자 기사 등외 다수)에 실릴 정도로 안양포도는 전국적인 관심의 대상이었다. 한때 포도를 가공하여 발효시킨 ‘안양 원포도주’가 출시되어  당시 흑백텔레비젼 및 라디오 프로그램에 협찬광고 형식으로 등장하는 등 안양포도 브랜드의 기세는 대단했다.  필자가 어렸을 적 가물가물하지만 라디오방송을 비롯하여  TV전파방송 등에서 '안양 원포도주'라는 가공 주(酒) 브랜드를 들어본 적이 있다.  당시 흑백으로 보던 동양방송(TBC)의 시청자참여, 인기오락  프로그램인 ‘장수만세(長壽萬歲, 사회 황인용 아나운서)’에서 ‘안양 원포도주’가 협찬형식으로 등장했던 걸로 필자는 기억하고 있다.   원종면 전,안양문화원장(전,새안양회 회장)에 의하면, “한때는  포도가공 산업이 발전하여 현,안양시 만안구 만안로 106번지(안양동), 구도로 인접, ‘금강자동차정비검사소’ 건너편 쪽에는 ‘안양  원포도주’생산공장(도라지양조 주식회사)이 존재했었다”고 필자에게 증언하시면서, 과거 안양포도를 발효시킨 가공 포도주생산으로도 안양은 명성을  날렸다고 한다.             

▲ 안양원포도주   출처: 예술과 철학 그리고  매화이야기<미술세상<안양원포도주<1973년 5월 광고 블로그 내 검색 blog.naver.com/maenam111/220182205085 예술과 철학 그리고...  

 

한때 안양포도는 명성을 떨쳐 자체 브랜드를 가진 포도주공장을  갖추고 있었으며, 안양의 명물로 국정교과서에 실렸을 정도였으며 전국에서 최상으로 손꼽는 상품성과 맛을 자랑하던 포도로 전 국민의 한결 같은  사랑을 받았다.          

안양의 명물, 안양포도는 일제 강점기 ‘오끼’, ‘야스에’와 같은 일본 영농인들이 1930년대  중반 일본에서 묘목을 가져다 재배하기 시작하면서 안양포도가 첫걸음을 내 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야기로 듣는  안양근대사 (안양학자료집 제6권, 성결대안양학연구소 2006, 발행일 2006.12.31. 편집인 문원식 성결대교수)’를 살펴보면 대 부농  ‘오끼’는 안양 2동지역에서 선진농법을 도입 안양 최초로 포도를 재배한 것을 알 수 있으며, ‘야스에’농장은 안양중앙시장 뒤 4동 파출소 인근에  있던 것으로 안양원로들은 증언하고 있다. 

고인이 되신  고,변원신 선생(1933~2015, 前안양읍 안양3리 이장)은 생전에 “일제 때 안양역세권을 중심으로 다수의 일본인들이 거주하기 시작하면서  농장과 회사가 운영됐는데 ‘오끼’라는 일본인이 안양 최초로 포도를 재배했다”고 밝힌 바 있다.

평촌지구에서 포도농사를 지은 최갑환(1924년생,  안양초교 7회졸업)선생 및 안양의 원로 김진행(안양초교 2회졸업) 선생은 당시에는 비료가 없어 인분으로 포도농사를 짓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말한다. 

1950년대 발간된  ‘금천지’에는 ‘구,안양유원지(현,안양예술공원)일원에 큰 포도밭들이 늘어져 있다.’는 기록으로 볼 때, 유원지일대에 안양포도가 명물로 사랑받으며  성가를 누리며 성황을 이루었음을 알 수 있다. 1940년 6월 5일 매일신보(수필문학 Essay)에 기고된 채만식(蔡萬植), 안양 복거기(安養  卜居記) 중에는 “여름 한철이면 푸울(pool)과 포도와 수박으로 그밖에도 관악산(冠岳山) 하이킹의 초입 처로 두루두루 서울 주민들에게 잘  알려진 그 안양”이라고 소개하고 있어, 1940년대에도 이미 안양포도는 서울 주민들에게 잘 알려진 우리시 특산 명품임을 알 수  있다.

공식적인 안양유원지(現,안양예술공원)의 출발은 1932년  당시 일본인 안양역장 ‘혼다 사고로(本田貞五郞)’가 철도수입 증대와 안양리 개발을 위해 조한구(趙漢九, 1833~1965, 호계서원에 배향된  인물인 독암 조종경의 후손) 초대 서이면장과 야마다(山田) 시흥군수 등을 설득하여 삼성천 계곡을 막아 2조의 천연수영장(안양 풀)을 조성하고,  1933년 ‘석수(石水)수영장’을 개장한 되서 비롯되며, 안양유원지가 전국적인 명소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한 단초가 된다.

당시 일본이 안양  풀행(수영장 행) 철도를 운영한 사례만 봐도 유원지의 유명세를 짐작할 수 있으며, 안양의 수영장은 일본인들이 많이 찾았던 명소로 알려져 있다. 

장석재(1938년생) 前안양문화원장은 “당시 풀장은 안양역에서 자금을 출자하여 만들고 안양역장이 관리했다.”고 하셨고, 고인이 되신 변원신  선생(안양시새마을회 초대회장)은 “당시 철도청에서 서울에서 철도로 ‘안양 풀’로 가는 휴양지를 만들었다“고 밝힌 적이 있다. 김중업박물관 인근에  현재 일본인이 살던 왜식(일본식) 근대건물이 남아 있는데, 사견으로 이곳에 살던 일본인도 아마 ‘안양 풀’에서 수영을 즐겼을 것으로 추정된다.  

안양예술공원 구,고바우식당 인근 옛 삼성천 수영장초입에는 당시  일본어로 ‘(안양 풀 pool)’이라고 세운 표지석이 아직까지 남아 있다. 자연석으로 된 거대한 암반의 초석에는 '안양 풀 소화 7년 8월  준공(安養 プ-ル 昭和 七年 八月 竣工)'이라는 일본연호 명문과 ‘마쓰모도(松本)’라는 공사 책임자의 이름도 확인할 수 있다. 당시 관광지인  안양유원지를 통 털어 속칭 ‘안양 풀’이라 부를 정도로 ‘안양 풀’의 명성은 대단해 유원지의 대명사가 되기도 했다.  ‘안양 풀’의 준공과  안양포도의 도입 시기 약간의 시차는 있지만 모두 비슷한 시기에 이루어졌다. 60년대 레져(여가문화)붐 조성 등과 맞물려 천혜의 자연 속 ‘안양  풀’인프라를 보유한 안양유원지(현,예술공원)에는 수도권 방문인파가 물밀 듯이 대거 몰리는 현상이 벌어진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안양원로 고,변원신(1933년생,  안양시의회 초대시의원) 선생은 당시 안양유원지에 ‘안양 풀’(pool)이 생기자 당시 일제는 임시열차행선지를 서울에서 ‘안양 풀(푸르)’행  ’이라 써 붙여 철도를 운행했다고 밝히면서, 안양풀장까지 임시버스를 운행할 정도로 인파가 대거 몰렸다고 증언한 바 있다.

즉, 안양 풀과  안양유원지를 혼용해서 사용했으며, 안양 풀(POOL)은 안양유원지의 대명사로서의 역할과 함께 그 유명세를 짐작해 볼 수  있다.  대량의 인파가 안양유원지의 대명사인 ‘안양 풀’을 방문하면서  자연스레 알게 된 안양포도, 유원지 행락객 등 산지포도의 대량 수요원(소비자) 확보와 함께 유원지주변 농지가 하나 둘 포도밭으로 변모된 것으로 사려 된다.

1932년 7월 21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안양유원지 관련기사를 살펴보면, 「돌과 물이 좋아 ‘석수(石水)수영장’으로 이름 짓고  임시열차를 운행할 정도로 인기가 좋았다. 포도의 계절이 되면 대학생들의 미팅장소로 애용됐으며 별달리 갈 곳이 없었던 시절 가족나들이를 나온  사람들로 안양유원지는 상당히 붐볐다.」 라고 밝히고 있다는 점을 참조하면, 석수수영장(안양 풀)과 포도(소비)의 상관관계를 유추해 볼 수  있다. 당시 서울 및 수도권 사람들이 안양유원지에 대거 몰려와서 맛본  안양포도는 유명세를 탔다.

안양유원지 방문객들의 미각을 돋구며 입맛을 사로잡은 포도는 안양을 대표하는 특산물로 전국에 명성을 떨쳤다. 기성세대 안양유원지(현,안양예술공원)방문객은 삼성천 계곡의  ‘안양 풀(노천풀)’에서 수영을 즐기며 길거리 가판대에서 시원한 냉·음료에 상큼한 포도를 음미했던 아련한 추억을 간직하고 있으며, 안양이 포도의  고장이라고 각인되어 있다. 지나간 이야기지만 고,변원신 선생(前,안양시고충처리위원장,  안양초 17회졸업)등 안양원로의 증언에 의하면 당시 안양포도는 직물공장 등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대소변을 처리하기 위해 웅덩이를 팠고, 이를  거름으로 활용해 포도가 재배되기 시작했는데, 그 이유는 “인분을 거름으로 주면 열매가 달다”는 이유 때문이라고 한다. 안양포도가 달고 유명세를  탄 것도 비료가 없어 인분을 거름으로 사용한 것과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 

지금은 유실되었지만, 필자가 취학 전 유년기에 포도밭에서 찍은  사진 한 장은 어렸을 적 우리 집은 포도농사를 지었음을 시사해준다. 과거 시흥군 시절 안양유원지 김중업박물관 바로 옆(중초사지 당간지주부근 및  삼성산경로당부지 일원)에서 포도를 직접재배 하신 필자의 부친 조재익(曺在益, 1938년생)은 안양포도는 ‘알이 굵고 달아 맛이 일품이다.’고  안양포도를 칭찬해 주셨다. 증언에 따르면 만안로 안양교사거리(영화아파트옆)에서 지하도 경유 안양유원지(현,안양예술공원 김중업박물관)쪽 방면에는  자동차도로를 중심으로 가로(街路)변에는 포도농가가 좌우로 즐비하게 분포하여 성황임을 알 수 있다. 1930년대 초반 개장된 ‘안양 풀’은  포도산업 및 지역경제에 미친 파장이 매우 크고, 우리안양을 관광도시로서 지역의 브랜드가치를 끌어올리는데 일조하였다.           

지난 60년대만 해도 90ha에 이르러 안양을 전국에 알리고,  지역경제 발전에 톡톡한 역할로 이바지했던 안양포도의 기억이 흐릿하게 잊혀져가고 있는 실정이다. ‘안양’하면 ‘포도’, ‘포도’하면 ‘안양’이라할  정도로 우리안양을 통째로 상징했던 ‘안양포도, 명성이 자자했던 그 안양포도가 점차 시들어가고 있다. 도시화의 물결에 밀려 점차 슬그머니 자취를 감춰 현재  ‘안양명물포도작목반(박봉진 회장/관양1동 간촌마을, 미주포도원)’을 중심으로 안양에는 10개의 농가(동안 8개, 만안2개) 3.9ha만이 안양의  옛 명성과 맛을 추구하며 안양포도의 명맥을 힘겹게 간신히 이어가고 있는 실정이다.

하지만 안양시민은 안양포도를 알아주지 않고 재배산지가 어딘지  아는 시민은 그리 많지 않다. 만안구 석수동에는 안양예술공원 김중업박물관 주변, ‘안양의  집’ 보육원 옆(유원지포도원) 및 석수철재상가 건너 인근 동산(그린포도원), 2군데 포도농가가 있고, 동안구에는 8군데의 포도 영농단지가 있다.  하지만 대다수의 시민은 안양포도에 대한 관심은 없고 그저 가까운 마트(가게)나 시장에서 포도를 구입하면 그만이다. 안양포도를 제치고 일상에서  접하기 쉬운 다른 지역출신의 포도로 대처되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이다.  

한편 안양시에서는 자원봉사 인력활용 포도농가  돕기(포도봉지씌우기 일손돕기 등), 포도상자 박스(지박스 4kg/5kg용량) 지원사업, 안양농협 등의 포도봉지지원 사업 등 각종 사업을 펼치며,  안양포도 육성사업을 펼치고 있지만, 안양시 등의 지원에도 불구하고 안양포도는 향후 흔적도 없이 사리질 거라는 비관적 전망이 앞선다.   

안양시 관양지구(동편마을)에 포도농가가 포함되면서 포도는 땅  속에 묻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현재 포도농가의 농장주(영농인)가 대부분 고령화(노령화)되어가고 있고, 일손이  많이 가는 포도농사를 대(代)를 이어 후손들이 가업(家業)으로 전승하는 것도 녹녹해 보이지 않는다.  안양시청 공식홈페이지에 게재된 안양시민의 노래를 살펴보면  ‘포도 알알 서린 전통 더 빛내어 물려주리’라는 문구가 등장한다.

시 홈피에 안양의 명물로 포도를 당당히 소개하고 있고, 안양시민의 노래(원양  원로시인, 김대규 작사/김동진 작곡)에도 등장하는 안양포도, 안양향토 문학가이신 김대규 선생(1941년생, 전 안양문화원 사무국장, 안양초  22회)은 ‘안양시민의 노래’ 제정 시 이런 노랫말을 작사함으로써 안양포도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하지만 안양의 전통과 자존심인 안양포도를  물려줄 수 있을 지는 의문이다. 자칫 이대로 가다간 2008 안양시 선정 ‘안양의 자랑거리’로 선정된바 있던 안양포도를 우리시에서 더 이상 맛볼  수 없는 지경에 이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안타깝다.  현상유지 이외에 특단의 대책 없는 한 안양의 명물, 안양포도는  역사 속으로 사라질 운명이기에 위기에 대처할 수 있는 적절한 대안이 나와야 한다.

안양의 자랑거리의 하나로 안양포도를 선정한 안양시는 메말라  시들어가는 안양포도를 살릴 수 있는 다양한 시책을 개발할 필요가 있다.  일반 가정에 생물(生物)이라 택배배달(통판 등)도 허용되지  않는 어려운 상황에서 안양포도만을 고집하는 것은 무리가 있어 보인다. 안양포도는 주로 농가직판, 산지 직거래형식으로 유통되기 때문에 주변에 쉽게  포도를 구매할 수 있는 편리시스템이 없다.  사정이 그러함에도 안양포도를 살리고자 하는 정책이나 대안은  찾을 수 없다. 존폐 위기에 처한 우리포도, 안양포도에 대한 시민들의 관심과 사랑이 필요한 것 같다. 안양시 및 농업 관련단체에서는 안양포도를  육성하기 위한 프로젝트팀 가동 및 정책개발이 필요하다.

안양포도를 살리는 길은 안양포도의 소비를 촉진하는 일부터 시작된다고  생각한다. 안양시 및 농업관련단체, 자원봉사단체, 각종 사회단체 등의  포도농가지원은 물론 포도밭 (무료)견학 및 포도수학 체험활동 프로그램 운영 등도 안양포도산업 활성화에 보탬을 줄 수 있다. 또한 산지직판이라는  유통의 한계를 극복하고, 안양포도의 대중화 및 저변확대를 위한 정책개발이 안양포도를 살릴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안양포도 접근의 어려운 점은 홍보부족 등으로 안양포도의 정체성  및 산지를 대다수 시민들이 모른다는 점이다. 안양의 한 포도농장 주인이 언급한바와 같이 ‘포도 맛은 일품인데 파는 곳을 몰라서 못 산다’라는  말에 귀기 울 필요가 있다.

안양포도 산지에 대한 홍보 및 주민계도가 필요해 보인다. 포도 산지를 시민들이 접할 길이 거의 없고 알음알음  방식으로 구매를 촉진하는 구태의연한 판촉방법은 문제가 있다. 잊혀져가는 안양포도를 살리기 위해서는 온라인 및 오프라인 매체 등을 통해 다양한  방식으로 적극 알려야 하며, 소비자가 알아야 구매로 연결되지 않을까?  홍보마케팅이 부족하다면 안양시민이 안양포도의 산지를 제대로 알  수 없다는 점에 주목해야한다. 또한 안양포도가 일반 상점이 아닌 산지 직거래 구매라는 원시적 유통방법을 고집하고서는 포도의 저변확대 및 대중화에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안양포도를 구입하려면 바쁜 일상을 뒤로 하고 농가 있는 산지나 외지로 찾아가야 한다는 얘기다. 한때 안양예술공원 및 김중업박물관 일원은 과거 안양명물 포도가  생산되었던 주산지였던 점을 감안하여 안양 옛 포도의 추억을 살릴 수 있는 문화콘텐츠를 개발하여 문화관광자원으로 육성할 필요가 있다.   안양예술공원 일원 또는 김중업박물관 일원에 조경수로 포도를  가꿔 지역의 정체성을 살렸으면 한다.

포도나무 조경수를 식재하고 포도분수 등 공공조형물(예술작품)을 설치하여 안양의 상징으로 가꿀 필요가  있다. 김중업박물관 일원에는 포도동산, 포도분수 등 포도 관련  콘텐츠를 개발하여 관련인프라를 설치하고, 예술공원 주변, 포도 농가를 적극 육성하여, 안양예술공원 방문객이 안양포도를 음미할 수 있는  ‘안양포도시스템’을 구축할 필요가 있다. 안양예술공원 포도밭의 추억들, 도로 옆 가판대에서 파는 알알이 익은 포도 그리고 시원한 가판  냉․음료수의 기억 등 그 시절의 아름다운 추억을 그려본다.

오늘날 일상에서 안양포도를 접하기는 어려운 여건이지만, 우리의  선량한 이웃인 안양시민이 직접 재배하는 포도밭을 찾아 가을의 정취도 만끽하고, 포도농가 및 지역경제 활성화에도 이바지하면  어떨까? 보통 포도의 당도가 15~16도인데 비해, 안양포도 ‘캠벨’은  19~20도까지 당도가 나올 정도의 높은 당도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우수한 품질로 호평을 받았다. 일부 농가에서 생산되는 안양포도는 재배농가의  토양과 수질, 당도, 잔류농약 등 까다로운 측정과 검사를 거쳐 국가공인기관인 국립농산물품질관리원의 품질인증을 받은 양질의 포도를 생산하여 옛  명성을 이어가며 소비자의 입맛을 사로잡고 있다. 건강상의 이유 등으로 포도농사를 영위하기 어려운 여건임에도  안양예술공원 김중업박물관 인근(‘안양의 집’보육원 옆)에서 포도농사를 일구며 안양포도의 맛을 이어가는 ‘유원지포도원’의 김경수씨(64)는  “농약을 치지 않은 상태에서 재배한 안양포도는 껍질이 얇고 당도도 높은데, 그 참맛을 모르고 지레 농약 걱정에 껍질을 벗겨먹는 사람들을 보면  안타까울 따름이다.”고 강조하며 안양포도를 제대로 먹는 법을 조언했다. 

포도의 좋은 성분은 콜레스테롤 낮춰 심장질환 예방, 노화방지,  다이어트와 암 예방에도 도움이 되는 등 인체에 유익한 좋은 과일이다. 이왕 먹는 포도, 기왕이면 안양의 포도 산지를 찾아 안양 포도를 소비하는  것도 이웃사랑, 안양사랑, 진정 내 고장을 사랑하는 실천방법이 아닐까? 

안양시에서는 “안양포도 구입 장소로는 (관양1동 현대아파트  뒤)푸른 포도원, (인덕원역 주변)인덕원포도원, (안양예술공원 김중업박물관 주변, ‘안양의 집’보육원 인접)유원지포도원 등이 있으며 안양시청  고용경제과 도시농업팀(☏ 031-8045-2312)으로 문의하시면 정성껏 상담과 안내를 해드리겠다”고 밝혔다. 

안양시 길거리에 다 먹고 버려진 타 지역 출신의 포도박스가  아닌, 관내생산 안양포도 종이박스가 즐비하게 많이 볼 수 있는 행복한 날이 오길 기대한다. 포도가 주렁주렁 열린 포도나무에, 포도송이 알알이  익어가는 안양포도의 향기를 가슴속 한구석에 담고 싶다. 본 논고가 점차 기억 속에서 잊혀져가는 안양포도의 부활을 알리며, 지역 포도산업 발전 및  지역경제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기폭제가 되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