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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영]70년대 안양중앙시장 번영회 이끈 새마을지도자

안양똑딱이 2016. 8. 23. 20:19

성공요인

이 마을(안양4동)은 안양시 중앙로 변에 위치하고 있는 상가마을로서 몇 년 전만 하여도 무질서하게 이루어진 상점들로 각처에서 모여든 상인들이 장사 시샘으로 인한 시기와 갈등으로 가득 찬 이기적이고 배타적인 마을이었으나, 30세의 젊은 나이로 시장 번영회장 직을 맡은 김 지도자가 시장 번영과 상가 정비를 위한 헌신적인 노력으로 노점상 철거 및 상도의 질서 확립운동을 전개, 명랑하고 쾌적한 근대화 시장을 조성하여 소비자들의 편익을 도모하였고 76년도에 마을금고를 설립하여 789월말 4억 원을 저축한 우수 시장 새마을이다.

 

마을현황

 

기 구 : 1,989 세대

인 구 : 9,250(4,482, 4,768)

 

이 마을은 안양시 중앙로 변에 위치하고 있으며 1,989세대에 9,250명 주민이 상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안양시에서 가장 규모가 큰 시장이 위치하여 안양시민 17만과 시흥군민 15만의 유통거래 중심지가 되고 있는 대단위 소비시장이기도 하다.

 

그러나 현 중앙시장이 개설되기 이전에는 안양의 명물인 포도밭과 일부 밤나무 밭으로 이루어진 풀과 잡초 속의 농촌마을 모습이었고, 7,8년 전 시흥군 안양읍이었던 당시만 하여도 이 공설시장은 각처에서 모여든 영세상인들로 시장을 구성하고 있어 이기적이고 배타적이었으며 장사시샘으로 인한 시기와 갈등 속에 가득 찬 무질서하고 난잡한 시장이었다.

 

10여 년 동안 무질서하게 이루어진 시장 내의 주민들은 새로이 이주해 오는 상인들과 이해와 협조보다는 밤낮없이 술에 취해 싸움이나 일삼았으며 그날 벌어 그날 먹기나 하면 다행으로 여기던 것이 그 당시의 시장 실정이었고, 새마을운동이 국민적인 운동으로 정착되어 가고 있던 1975년까지만 하여도 새마을운동은 이 상가에서 외면당하고 있던 실태였다.

 

이때 김 지도자의 집요한 불굴의 의지와 투지로 시장 상거래 질서 확립과 상가 환경을 쇄신시킴은 물론 노점상들의 철거 정비 및 시장 상도의를 확립하여 웃고 팔고 웃고 사는 명랑한 상가분위기를 조성하여 소비자들의 편익을 도모하고 마을금고를 설립하는 등 시장 새마을운동을 전개하여 나갔다.

 

고난의 역경을 딛고 일어선 지도자

 

김 지도자는 경기도 화성군 우정면 원안리에서 출생하여 이곳에서 중·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넉넉지 못한 가정사정으로 대학진학의 뜻을 포기한 후 군에 입대하여 1962년에 군복무를 마치고 일하면서 대학공부를 계속할 길을 찾아 안양 중앙시장 내의 작은 월세 점포 방을 얻어 잡화상을 시작하게 되었다.

 

낮에는 장사를 열심히 하였고 밤에는 조그마한 점포 안에서 공부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은 결과 1966년에는 드디어 어려운 난관과 역경 속에서 중앙대학교에 입학을 하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다.

 

그후 김 지도자는 30세의 젊은 나이로 안양 중앙시장을 이끌어 나갈 번영회장의 중책을 맡은 후 시장번영과 발전을 위한 노력은 물론 소비자보호운동을 전개하는 등 시장 내부 정화운동을 펴서 배타적이고 이기적인 상인들을 규합하여 지역사회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여 나갔다.

 

그는 번영회장의 막중한 임무수행과 병행하여 만학의 수업을 계속하는 불굴의 의지로 대학을 졸업하는 벅찬 감격을 맞이하기도 하였고 또한 중앙대학교 사회개발대학원을 졸업하여 지역사회 일꾼으로서 자질향상에도 힘써 나갔다.

 

시장 새마을운동의 첫발을 내딛다.

 

이러한 김 지도자의 시장 정화운동과 마을발전을 위한 노력의 결과 76년도에는 주민들에 의해 새마을지도자로 선출되어 번영회장직과 함께 12역의 중책을 맡아 중앙시장과 함께 마을을 변모시켜 나갔다.

 

그해 3월 중앙시장에서는 주민 1,0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중앙시장 새마을운동 촉진대회를 대대적으로 개최하여 그동안 무관심과 비협조로 뒤떨어진 중앙시장내의 새마을운동을 강력하게 추진할 것을 결의 하였고, 이 자리에서 김 지도자는 시장 새마을운동의 첫 번째 사업으로 무질서한 상가 정비를 비롯하여 소비자 보호를 위한 불량상품 불배운동, 상도의 질서 지키기 및 고운 말 쓰기, 정찰 제 실시와 노점상 단속에 이르기 까지 10여개의 사업을 추진 할 것을 1,000여명의 주민들 앞에서 굳게 다짐하였다.

 

이러한 시장 새마을운동을 전개해 나가는 데는 상인들을 규합하고 계몽할 앰프방송 시설이 절실히 요구됨을 안 김 지도자는 안양시 상공회의소에 지원을 요청하여 마을 부담금과 함께 25만원의 사업비로 고성능 앰프방송시설을 설치 완료 하였다.

 

새마을운동이란 우리 주변의 하기 쉬운 일부터 몸소 실천하는 것이라는 것을 아침 저녁마다 앰프로 계몽방송 한 결과 전 상인들이 자기 점포 앞은 물론 도로에 흩어져 있는 쓰레기와 오물을 치우는 등 시장 내 불결한 지역이 하나 둘씩 쇄신되어 나가기 시작하였다.

 

시장 내 잡상인 철거 작업

 

그러나 중앙시장은 시장 중심을 가로지르는 도로를 기준으로 위골목과 아랫골목에서 지역과 골목 간에 장사 시새움으로 인한 대립이 심각할 뿐만 아니라 특히 잡상인들이 들끓어 이들의 도로 무단점용은 물론 고객에 대한 횡포와 거래의 무질서는 시장발전을 저해하는 요소가 되었다.

 

마을에서는 시장질서 확립은 물론 소비자 보호를 위하여 이러한 잡상인들을 철거키 위한 사업을 과감히 착수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들에게 시장은 수년 동안 생활의 근거지가 되어 왔기 때문에 일시에 정리한다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었고 그들은 가난한 영세상인들로서 여기를 떠나면 당장 생계의 위협을 받는 형편이었다. 철거작업을 시작하니 갖은 욕설과 행패를 당하기가 한 두 번이 아니었고 한편 눈물로 호소하는 상인을 대할 때는 동정하는 마음이 앞서기도 하였으나 전 시민이 원하는 사업이요, 지역상인 전체의 질서 확립을 위해서도 포기할 수 없는 사업이었다.

 

이후 마을에서는 철거상인을 위한 이주대책을 의논하여 이들에게 새로운 상가지역을 알선하여 주는 방법과 신설시장 내로 입주하는 방법 등 여러 가지 해결책을 모색하여 순조롭게 이끌어 갈 계획이었으나 우리를 내쫓고 저희만 잘 살려 한다.”는 등 온갖 항의와 위협 속에서 회의장은 이들 노점상인들에 의하여 수라장이 되고 더욱이 추진위원 집까지 찾아다니며 욕설과 행패를 일삼을 때 일부 추진위원들은 그 직을 사퇴하는 사례까지 번졌다.

 

철거 작업은 일시 중단 되었고 허탈과 실의에 빠진 위원들은 본 사업을 포기하자고 까지 이야기하였으나 여기서 좌절하지 않았다. 결코 하고야 말겠다는 일념으로 더욱 강력한 추진위원 체를 구성하여 경찰까지 동원하는 온갖 시련과 역경 속에서 3개월 만에 일부는 시장내부 상점으로 입주 시키고 일부는 신설시장으로 유치시키는데 성공하였다.

 

말끔히 정비된 상가

 

하면 된다는 새마을정신으로 드디어 깨끗하고 질서 있게 조성 된 상가를 바라볼 때 추진위원들과 주민들은 뜨거운 감회의 기쁨을 감출 수 없었고, 이후 상인들의 근면 자조 협동 하는 새마을정신은 상가를 몰라보리만치 변모시켜 놓았다.

 

불량간판 123개소를 정비하였고, 바라벳 950m를 설치하였으며, 퇴색하여 보기 흉한 벽체 260여 평을 깨끗이 도색하였고, 주민부담금 6,477만원으로 뒷골목 포장 18,370m와 하수도 4,080m를 정비 완료하였다.

본래 몇 십 원도 아끼고 절약하는 상인들한테서 이러한 거대한 공사비를 부담하게 하기까지는 그 동안 끊임없는 설득과 고충이 뒤따랐지만 상인들 스스로 하고자 하는 자조정신이 이 중앙시장 내에 뿌리를 깊이 내렸던 것이다.

 

한편 시장의 내실화를 기하기 위하여 정찰가격 표시와 고운 말 쓰기, 불량상품 추방운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하여 소비자 보호에 크게 기여하였고, 20여명의 상인으로 구성된 청심회 회원들은 시장 내 조기청소를 전담하여 중앙시장을 쓰레기 휴지 없는 깨끗한 상가로 일신 시켜 놓았다.

그렇게 배타적이고 이기적이던 상인들이 이제는 일선장병을 위문하기 위하여 의류 600여점과 현금 50만원의 성금을 스스로 거출하였고, 방범대원을 위하여 TV를 구입 전달하는 등 이웃을 돕는 상부상조의 마을로 탈바꿈 되었다

 

마을금고 설립으로 이룩된 복지시장

 

76년 마을에서는 시장 내 사채와 계 및 사설금융 등으로 상인들 간에 만연되어 있는 불신풍조를 해소시키기 위하여 상인대표 몇 사람과 동 관계 공무원을 모아 놓고 마을금고 설립에 대한 상의를 한 후 반상회와 시장번영회를 통하여 대대적인 주민들의 협조를 구하였다.

 

그러나 마을금고를 이해하지 못하는 대부분의 주민들이나 상인들은 마을금고라는 생소한 말에 무관심을 나타내는가 하면 몇몇 사람들은 지도자가 마을금고라는 사설금융을 차려 돈을 벌려 한다고 엉뚱한 소문을 퍼뜨리기도 하였다.

 

김 지도자는 여기에 굴하지 않고 지체 없이 마을금고육성 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설득력이 강한 임원 및 사람을 동원하여 가정과 점포를 가가호호 순회 방문으로 계속 이해시켜 나간 결과 148명의 회원을 확보하였고, 517만원의 마을금고 자산으로 19766월 드디어 희망에 찬 개소식을 갖게 되었다.

 

그 후 마을금고가 1차 목표액을 달성할 때까지에는 금고에서 단돈 10원을 지출하여서는 안 된다는 방침을 세우고 임원들의 부담으로 모든 경비를 지출하여 나가면서 출자금 증대에 온갖 정성과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어린 초등학교 학생들이 절약한 용돈을 저축하러 오면 1020원을 마을금고에서 더 보태 예치하여 저축심을 앙양시켰으며, 임원들의 순회출자 독려 시 영세상인들에게 1,000원 또는 2,000원씩의 저축과 적금을 권장하여 나갔고 1가구 1통장 갖기 운동을 전개하여 단돈 1,000원이 없어 통장을 갖지 못하는 영세상인들에게 주머닛돈을 보태 통장을 마련하여 주는 등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독려를 거듭한 지 4개월이 지난 후 안양4동 마을금고는 시범마을금고로 지정 받는 영광을 차지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전 회원과 임원들이 출자금 증대를 위한 부단한 노력의 결과 창립 13개월 만에 안양4동 마을금고는 1억 원을 돌파하는 대형금고로 성장되었다.

 

이로서 방관하고 불신하던 주민들과 은행을 거래하던 상인들도 마을금고를 이용하게 되었고 하루 거래액이 2,3천만 원으로 확대 되어 단독사무실과 은행 규모의 사무처리 시설을 필요로 하게 되었고 주민들이 돈을 필요로 하게 될 때는 항상 1,2명의 보증으로 쉽게 그리고 빨리 찾아 쓸 수 있는 여·수신 업무의 원활한 기능발휘에 힘 입어 창립 16개월이 되는 날에는 회원 3,000명과 자산 2억 원을 돌파하여 자축 기념식을 성대하게 거행하기도 하였다.

 

이후 마을금고에서는 그동안 영세상인들이 쓰고 있던 모든 사채를 청산하도록 마을금고에서 대부하여 주었고 시장 내 사유지 매립당시 은행에서 대출을 받을 수 없던 영세상인 30명에게는 2천만 원을 융자해 주어 불입금을 해결토록 하는 등 명실 공히 마을금고 본연의 업무를 충실히 수행해 나가고 있다.

 

창립 후 23개원만인 789월에는 회원 4,200명과 자산 4억 원을 돌파하는 놀라운 성장을 보여 마을금고로서의 면모를 과시하기도 하였다.

 

새마을운동의 중추적 모체인 마을금고

 

안양4동 마을금고는 79년도에 회원 6천명과 자산 10억 원을 목표로 마을금고 업무에 더욱 신중을 기하여 추진하여 나가며, 새마을운동의 중추적 모체로서의 역할을 다하도록 할 것입니다.

영세주민들의 학자금, 의료비, 주택 건축비 등 대부규정을 더욱 확대 실시하여 주민 복지사업에 크게 기여할 방침이고 대형금고로서의 사무처리기능을 보강하기 위하여 전문 금융인으로 근무토록 할 예정이며 또한 온 주민들과 상인들의 숙원사업인 종합근대화시장을 건립하기 위하여 별도 기금조성과 세부사업계획 수립에 여념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