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지역얘기/담론

[조성현]태조왕건과 고려 안양사

안양똑딱이 2016. 7. 24. 17:02

[조성현]태조왕건과 고려 안양사

[2011/05/05]안양시문화관광해설사

 

태조왕건과 고려안양사
문헌 속 고려‘안양사(安養寺)’는 안양시 지명(地名)유래의 근원이며 뿌리인 유서 깊은 사찰

안양시문화관광해설사 조성현

안양(安養)이란 불가에서 아미타불부처님이 상주하는 청정(淸淨)하여 맑고 깨끗한 안양세계(安養世界), 극락정토(極樂淨土)를 말하며 불가에서의 안양(安養)은 내가 사는 고장의 이름과 일치한다.

불교용어이지만 도시 ‘안양’은 불교의 극락, 기독교의 천당 등 유토피아적 이상향의 살기 좋고 행복한 곳이란 철학적 의미가 지명 속에 담겨져 있어, 지명 그대로 따르면 우리시민은 오직 즐거움만 있는 아늑한 이상향의 도시에 살고 있는 행복한 시민이다.

2004년 7월 23일부로 안양시의 위촉을 받은 이래 ‘안양시문화관광해설사(다음 카페, ’마애종사랑‘ 검색어입력 참조)로 봉사활동을 하면서 우리시의 지명유래의 뿌리이며 근원인 ‘안양사’(安養寺)라는 사찰이 도대체 어디일까? 라는 지역의 정체성과 관련된 사항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기록 속 안양지역 고려 불교문화를 찬란하게 꽃피운 ‘안양사’는 신라 효공왕 3년(900년)에 고려태조 왕건(王建, 877~943)이 지방을 정벌하러가다가 삼성산에 오색구름이 피어오르자 살피던 중 능정(能正, 실존인물이라고 함)이라는 스님을 만나 세워진 사찰로 전해진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고려 최영(崔瑩)장군(1316~1388)이 7층 전탑(塼塔, 벽돌로 만든 탑)을 세우고 왕이 환관(내시)인 박원계(朴元桂)를 시켜 향(香)을 보냈으며, 당시 승려 1,000명이 성대하게 불사(佛事)를 올렸고 시주를 바친 각계의 인사가 무려 삼천명이라는 기록이 존재하고 있어, 당대 고려 안양사는 사세(寺勢)가 만만치 않은 대규모 사찰로서 고려 중앙정부와 긴밀히 연동되는 국가 중요사찰로 여겨진다.

문헌 속 아름답고 화려한 7층전탑이 있던 고려 ‘안양사’는 안양시의 지명(地名) 유래의 근원으로 현, 안양예술공원 초입(구, 유유부지일원 등)에 통일신라 중초사를 중심으로 고려국조 왕건이 창건에 관여한 이래 고려~조선까지 법통이 이어지는 유서 깊은 사찰이나 어떤 연유로 폐사되어 아쉽게 사라지고, 사찰문화재인 당간지주 등과 안양사 사찰터(廢寺址)가 남아 천년이 넘는 오랜 세월과 함께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과거 (주)유유에서 ‘비나폴로’ 등 유명약품을 생산한 제약공장이 있던 유유(산업)부지(석수1동 212-1번지외 일원)는 당간지주에 신라 흥덕왕 827년이라는 완공시기가 명문화되어 연원이 밝혀진 안양지역 오랜 사찰로 추정되는 통일신라 ‘중초사(中初寺)’이래 고려 ‘안양사’가 조선까지 불맥을 이어간 사찰지로 중초사지당간지주(보물 제4호), 고려 삼층석탑(경기도유형문화재 제164호)등의 사찰유적이 남아 있고, 인접 안양사권에는 통일신라말~고려초기 작품으로 추정되는 석수동마애종(경기도유형문화재 제92호) 및 고려시대 문화유산인 안양사귀부, 안양사부도, 안양사석실분 등이 남아있어 안양시 석수동지역은 조상들의 얼과 숨결을 느낄 수 있는 신비로운 곳이다.

빼어난 자연경관을 자랑하는 안양예술공원 초입의 유유부지주변은 과거 수백년간 매년 음력 10월 3일 마을제인 ‘석수동쌍산신제’가 계승되어온 지역으로 지금도 삼성산경로당의 어르신을 중심으로 제한적이나마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1950년대 과거 안양유원지시절 방문객의 미각을 돋구었던 안양포도밭이 있던 구,유유(산업)부지는 평양출생으로 프랑스 르코르뷔제 건축연구소에서 수업을 하고 미국하버드대의 객원교수 등을 역임한 적이 있는 고(故)김중업선생(金重業,1922~1988)이 설계한 유일한 공장건축물 작품들이 남아있고, 특히 생산동 공장 2층 건물외벽 모퉁이에는 파이오니아상(Pioneer像)과 모자상(母子像)이 설치되어 있어 이색적이며, 과거 유원지시절 공장건립 후 술에 취한 행락객들이 제약공장을 숙박시설인 호텔인줄 잘못알고 투숙을 요구하며 경비실에서 걸핏하면 실랑이가 벌어지곤 했던 진풍경이 연출되던 곳이다.

안양시는 (주)유유 안양공장이 제천으로 이전함에 따라 2007년 5월 구,유유부지 및 아름다운 공장건축물을 매입하여 공장부지를 복합문화공간으로서의 활용계획을 모색하기에 앞서 매장문화재의 보호와 보존을 기하기 위한 일환으로 (재)한울문화재연구원(원장, 조사단장 김홍식)과 함께 발굴조사를 벌여왔고, 발굴조사 과정에서 2009 지난해에는 안양사명문와편(安養寺銘文瓦片, ‘안양사’라고 새겨진 기와조각)등이 여러 점이 출토되었다.

한편 2010 금년 2차 발굴에서는 기록 속 최영장군이 전탑을 보수했다고 등장하는 전탑지(塼塔址)에서 무너져 폐기된 전과 기와편들이 청자연봉 등과 함께 발굴되는 등 기록 속 ‘안양사’와 관련된 유물들(관련 사진자료, 다음카페<‘마애종사랑’ 검색어입력 참조)이 무더기로 출토되어 도시 안양의 정체성과 안양시지명(地名) 유래를 규명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지만, 지역의 역사와 함께한 고려 ‘안양사’는 안양시 지명유래의 근간으로 지역의 정체성확립과 관련된 중대한 사안으로 지역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큰 만큼 추가적인 발굴로 계속 이어져 안양시 지명유래의 뿌리이며 근원인 ‘안양사’의 실체를 제대로 밝히고, 안양사권 사역의 범위를 명확히 규명하자는 목소리가 발굴청원자인 정덕한 선생(향토사학자)을 중심으로 일어나고 있다.

발굴조사 과정에서 제한적이나마 속살을 드러낸 ‘안양사’는 고려 중앙정부와 밀접한 관련성을 맺고 있는 대규모 사찰로 사격(寺格, 사찰의 품격)이 매우 커 국가사적으로 지정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한다.

안양시는 통일신라 ‘중초사’와 고려‘안양사’이래 조선까지 법통을 이어간 유서 깊은 사찰지가 있던 구,유유(산업)부지의 추가적인 발굴조사와 함께 건축물을 재활용하여 박물관 등 모든 연령층이 이용할 수 있는 복합문화공간으로 조성하여 시민들의 품에 돌려줄 야심찬 계획을 갖고 있다.

구, 유유(산업) 공장부지를 안양예술공원 인프라 자원구축과 연계한 복합문화공간으로 조성함에 있어 안양시가 부지와 기존 건축물을 재활용하여 어떤 작품으로 시민들의 곁에 돌려줄지, 그리고 향후 추가 발굴조사에서는 고려 안양사 관련 어떤 매장유물이 출토될지 결과가 주목된다.

고려태조 왕건과 최영장군 등 우리의 많은 선조들이 다녀간 기록 속 고려 ‘안양사’가 역사적인 실체로 우리시 석수동에 존재함이 속속들이 밝혀지고 있다.

안양시민의 일원으로서 안양의 뿌리인 도시의 정체성에 대해 가슴속 궁금증을 품고 있었던 곳 고려 안양사. 발굴조사과정에서 드러난 고려 안양사지는 내가 태어났고 현재 아버님과 동생이 거주하는 자택과 이웃하여 바로 인접해 있다.

통일신라 ‘중초사’와 고려‘안양사’이래 조선까지 법통을 이어간 유서 깊은 사찰지가 있던 내 고장 안양시 석수동.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내 고장 안양의 문화관광해설사로서 역사와 문화 관련된 지식과 정보를 문화재해설로 시민들과 함께 더불어 나누며 소통하고 작은 봉사를 할 수 있음에 나는 행복하다.
(안양시홈페이지 등 참조수립, josh1965@hanmail.net)
2011-05-04 15:20:14